안녕하세요 :)
에디터 우꾸입니다.
지난 글에서 연구자의 삶으로 사는 것이 참 피곤하다고 이야기 했었죠.
실패가 일상일 수 밖에 없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실험에서 실패를 할 때마다 마치 ‘고백을 하고 차이는 기분’을 느꼈었으니까요.
이러한 ‘실연’이 계속 쌓이면서, 제 멘탈은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작년 (2023년) 12월 겨울이었죠.
당시 저는 준비하고 있던 논문의 막바지 작업에 돌입해야 했습니다.
제가 개발한 나노 물질을 쥐에다가 주입하고 그 결과를 관찰해야 했었죠.
다만 제가 있는 연구실은 쥐를 비롯한 동물 실험을 할 수가 없었기에,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광주로 출장을 가야 했었습니다.
직전에 진행했던 동물 실험이 실패로 끝나버렸고,
그 덕에 유관기관과 급하게 논의하여 동물 실험 일정을 겨우 잡을 수 있던 터라
당시 저는 주말 출근까지 불사하며 실험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직전의 실패와 주말 출근에 대한 분노, 피로 누적으로 제 멘탈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광주에 도착해서 5일간의 동물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실험 자체는 쥐에다가 나노 물질을 주입하고 자기장 처리를 하는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었기에
실험실 옆에서 실험 결과를 기다리며 붕 뜨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눈에 밟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외모와 억양을 보면 서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온 듯한, 나이는 3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던) 연구실에 소속된 박사 후 연구원(포닥)으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매일 오후 2시에 따듯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연구실에 들어와
실험실 옆에서 긴장감에 벌벌 떨며 실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저한테 매일 인사를 했었습니다.
출장 실험 4일차.
그 날도 그 포닥 분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연구실로 들어섭니다.
서로의 존재가 제법 익숙해졌을 때 쯤,
그제서야 그는 제 소속과 제가 하고 있던 실험에 대해서 물어왔습니다.
저는 제 소속을 밝히고, 지금 하고 있던 실험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실험이 실패하지 않길 바랄 뿐이죠.’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조금 변하더니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Do you think of yourself as a scientist?
(본인 스스로 과학자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제 학과의 영문명도 ‘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이기에,
“Kind of. (뭐 그런셈이죠.)”라고 공허히 답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제 뒤의 공간을 쳐다보며, 그러나 명확히 제가 들으라는 듯하게 말했습니다.
“과학자에게는, 실패한 실험이란건 없답니다. 나쁜 실험 결과라는 것도 없죠.
기대한 결과가 나온다면 세웠던 가설을 입증한 셈이고,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과학자는 모든 실험에서 무언가를 배워나가기 때문에, 모든 실험은 성공한 실험이랍니다.”
명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성공’과 ‘실패’가 명확히 구분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시험을 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성적이 나오면 ‘성공’, 그렇지 않으면 ‘실패’.
지원한 학교에 붙으면 ‘성공’, 떨어지면 ‘실패’.
내가 예상한대로 결과가 흘러가면 ‘성공’,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면 ‘실패’로 정의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들을 그저 하나의 ‘결과’로 받아들였다면?
더군다나 학교를 졸업한 이상, 웬만해서는 ‘다음 기회’가 주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데,
눈 앞의 현실이 내 기대와 어긋났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절망에 무릎 꿇고 공포에 사로잡혀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걷어 차버리는 것이야 말로 바보같은 짓이죠.
훗날 되돌아 보았을 때, ‘실패’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진짜 실패겠죠.
다음 날.
왜인지 그 분은 실험실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날 실험이 끝날때까지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저는 결국 그 ‘과학자’의 이름도 모른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 깊은 깨달음을 얻고서 제 삶이 크게 변했냐고요?
아니오.
저는 지금도 새로운 실험을 할 때마다 ‘실패’가 두려워서 몸서리칩니다.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한숨도 푹푹 쉬고요.
그래도 가끔씩이나마 그 과학자가 제게 해준 말이 불현듯 떠오르면
‘그까이꺼 다시 해보지 뭐.’라는 용기와 의지가 생긴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너무도 뻔한 말이지만 정작 지키기는 너무 어려운,
그러나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말인것 같습니다.
PS.
그 동물 실험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실험이 끝나고 다시 제 연구실로 돌아와 데이터를 정리해본 결과,
광주에서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과 달리 기대했던 결과가 잘 나와주었답니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실험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