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몇 번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보낸 10대 시절에서 그런 기억이 있다면 단연코 수능 보기 하루 전 일어났던 사고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늘 중간 언저리였다. 그런데 이건 내신 성적만 말하는 것이고 모의고사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사실상 중하위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못' 했을 뿐이지 공부량만 놓고 보면 전교 1~2등이나 '나'나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반에 가면 왜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 말씀 말똥 말똥 들어가며 필기를 하는 '척' 하는 학생이 있지 않은가. 그런 학생이 나였다.
본격적으로 대학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를 고1이 끝나갈 무렵 어느 한 드라마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제목은 '드래곤 사쿠라'라는 일본의 입시 관련 소재를 다룬 성장 드라마인데 주연들이 어려운 환경에 처했음에도 도쿄대를 가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는 내용이다. 이전까지 학벌에 대한 내 욕심은 없었다. 그냥 지방 국립대만 들어가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으로 대학에 대한 목표설정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목표는 고려대 경제학과. 그리고 나는 이 때 부터 인강과 학습지를 통해 본격 수험생 모드로 진입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도 살아보고 입시학원에도 다녀봤다. 당시 공부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다는 PMP를 통해 모든 인강 전문가라는 자들을 섭렵하고 다녔다(물론 다른 것도 많이 넣어 봤다..). 학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순위매김질을 해댔고 지칠 때면 드라마에서 나왔던 명언들을 되새기며 마음을 추스렸다. 수포자였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인강은 수리였다(선생님이 삶에 도움되는 딴 소리를 참 많이 해주셨기에..). 독서를 누구보다 많이 했지만 언어영역은 한 번도 2등급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외국어는 오죽 했을까? 팝에 눈을 일찍 떠 영어를 좋아했음에도 성적은 늘 5등급 언저리였다.
모의고사를 볼 때 마다 정말 처참한 수준의 성적표를 받아오곤 했다. 상위권만 따로 방과 후 수업을 듣는다는 '스카이' 반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진 않았다. 내 곁엔 '사쿠라기 켄지'(드래곤 사쿠라에서 동기부여를 해주는 선생님)가 있었고 언젠간 반드시 목표에 도달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간직했다. 고3 때는 독서실까지 추가하며 공부에 탄력을 주었지만 모의고사 성적은 그대로였다. 내신은 잔잔한 물결 상태, 조금씩 이상에서 현실로 발을 내디뎠다.
완강했던 목표는 고려대에서 서울 상위권으로, 어느덧 인 서울로 내려앉앗다. 더 나아가서는 지방 국립대를 가는 것으로 현실에 맞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이 때, 수능까지 3~4개월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성적이 조금씩 오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수능 만으로 대학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루한 내신이 그나마 모의고사 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나는 내신+수능 최저 등급 전략으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주력과목 이었던 언어, 외국어, 사회탐구 영역에서 조금씩 오르는 성적이 나오면서 나에게도 희망이 찾아왔다. 수시 조합만 잘 하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대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막판 스퍼트라고 생각하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야구가 전승으로 금메달을 딴 기념비적인 사건도 당시 나에겐 지나간 뉴스 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던 문제의 그날, 수능 '전' 날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