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올라와 우연한 계기로 내 관심 분야는 한 순간에 전환점을 맞았다. 고2 때였나 보다. 우연히 '토드 부크홀츠' 작가가 쓴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라는 책을 읽고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경제도서에 빠지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 케인즈, 마르크스, 밀턴 프리드만 등 그들의 생애와 철학을 접하는 것에 막대한 관심을 쏟아냈다. 선택과목은 경제였으며 원하는 과도 당연히 경제학과 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의 한 수로 평가 받을 정도로 나는 극적으로 경제 상식을 교양으로 삼을 수 있는 밑거름을 지닐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는 경제 도서, 더 나아가 사회과학 분야 책을 다양하게 읽어가던 시기에 맞춰 신문 읽기, 경제 라디오를 종종 청취 및 구독했다. 이러던 중 관심 분야는 조금 더 깊숙해져 금융 관련 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는 실용학문인 회계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 확대 되었다. 반면에 학교의 교양은 또 죄다 철학 관련 수업으로 도배를 했다. 서양 철학사, 미술사, 동양 철학사, 사회와 윤리 등 세상을 알아가는 기본 질서, 어떤 법칙 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다. 경제학자들은 사회 현상을 경제 논리로 풀어간다는 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는 데 도대체 철학을 논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리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자신들만의 세상 법칙을 만들려 했는지 궁금했다. 이는 또 정치의 영역으로 까지 확대 돼 자연스럽게 시사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고 팟캐스트 '나꼼수'는 이러한 내 행위에 불을 지핀 결과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때(또는 그 이후에도) 수많은 철학서(주로 철학서의 흐름, 또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등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이며 원하는 가치관을 얻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할지, 아니면 다양한 가치관들에 중립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지 등 삶을 지탱해줄 나만의 것을 찾는 것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블로그에 삶의 기준 또는 어떤 원리로 내가 가치판단을 하는지에 관한 생각들도 종종 옮겨봤다. 그러던 중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 존경해온 인물의 가치관과 내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살아가는 데 있어 나만의 기준이란 것들을 조금씩 정립하고 있다.
사회과학 도서(주로 경제도서지만)를 제외하면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책의 대부분은 에세이다.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 보단 개인의 삶 자체를 다룬 책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물이 보고·듣고·경험한 것을 글로 적어 그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 큰 위안을 주고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울할 때는 우울한 책, 기쁠 때는 즐거움을 주는 책, 게으른 삶에 자극이 필요할 땐 인물의 성공 스토리를 읽어가며 그들을 마음 속 심리 상담가로 받아들인다. 소설을 읽진 않아 상상력이 자극되진 않아도 지친 삶에 새겨진 상처 정도는 가볍게 치유할 수 있는 내적 항생제는 꽤 센 편이다. 어쩌면 독서 활동이 내게 있어서는 외로움을 달래주면서도 겸손함을 유지하는 내성적인 친구라는 생각마저 든다.
한바탕 부모님간의 물고 뜯기는 혈투가 끝나고 나면 종종 내 멘탈은 부서지기 일쑤였다. 흔한 부부싸움일지라 하더라도 어린 나이에 마주한 잔혹한 현실들은 절대 모두가 같을 수 없었고 그 '엿함'은 결코 수치화가 되지 않는다. 이런 나를 다독였던 건 게임도 아니요, 영화, 스포츠, 친구와의 수다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서 관심 가는 분야의 책 제목과 목차를 넘겨보는 행위야말로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고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해준 순간들이었다. 어디를 갈 때는 늘 몇 권 챙겨야 안심이 생길 정도로 책은 나에게 일종의 애착 인형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옆에도 에세이 한 권이 놓여 있다. 서점에는 5권의 책을 빌린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