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도현이었다. 그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바뀌었다.
“여기서 뵙네요.”
그는 반가움을 삼키며 조심히 인사를 건넸다.
“여긴 어떻게..”
다은은 도현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쳤지만, 그 만남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사실 무척 반가웠다.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옆에 있던 노인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 각자 책 읽어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반대편 책꽂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현은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때 본 그 아이는 누구인지, 왜 자신을 이토록 피하는지, 아니면 최소한 불편해하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하는 듯했다. 마치 바다와 강 사이 하구를 넘으면 쉽게 가라앉는 것처럼,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노인은 말을 걸어왔다.
”현이 왔니? 뒷방 노인네라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게야. “
“할매. 뒷방 노인네가 이렇게 예쁜가? “
“농도 잘하네 이놈. “
노인과 도현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농담을 주고받던 노인이 속삭이며 물었다.
“근데, 다은 양 하고는 아는 사이냐? 사장님이라고 부르더구만.”
“저번에 취업했다고 한 곳이 유온서점이었어요. 사장님이시고요. “
“그래, 안다. 다은 양이 면접 보느라 애먹었다고 했었어.”
두 사람은 한참을 다은에 대해 얘기했다.
다은은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책에 시선만 고정해 둔 채로, 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녀는 노인과 도현의 대화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14년 전, 그러니까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평범한 대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만나 설렘을 느끼고, 상대의 손을 맞잡고, 사랑에 빠졌던 그때의 감정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그녀는 그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쏟아지는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현실이 처참했다.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었다. 평소라면 책 세 권을 읽고도 남는 시간 동안 도현에 대해 생각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의 생각을 이 책방에 버려두고 가겠다고 다짐한 그녀는 노인과 인사를 나눈 뒤 문 밖으로 나섰다. 책방을 나가자마자, 벚꽃이 흐드러진 봄날의 따뜻한 바람이 그녀를 맞았다. 아름다운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한적하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기다리는 도현을 발견했다.
“사장님, 저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도현의 무거운 목소리가 밤공기에 섞여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