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며 말했다.
“… 내일 출근해서 봬요.”
그러자 다급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은 씨“
흔들리는 음성이 그녀의 마음에 내다 꽂혔다.
“그러니까.. 다은 씨는, 제가 싫으신 거죠?”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모든 걸 알게 된 후 마주할 얼굴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주저앉은 그녀의 처연한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작은 어깨는 미세하게 들썩였다.
도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어쩔 줄 몰랐다. 그녀의 마음속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망설임이 그의 발을 묶었다. 결국 그는 조용히 그녀의 곁에 앉아, 한참 동안 그녀의 처절한 울음에 젖어들어갔다.
무정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다은과 도현의 목소리였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정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난생처음 보는 엄마의 얼굴이었지만, 그 감정은 무정에게 전혀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다은의 특별한 감정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무정은 도현에게 향한 그녀의 마음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무정의 분노는 썩어가는 뿌리처럼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그 분노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불안정했지만, 깊이 묻힌 씨앗이 언젠가 터져 나올 날을 기다리듯, 무정은 두 사람을 차갑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각, 다은과 도현은 각자 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서 다시 마주친 그들은 어색하고 멋쩍은 모습으로 마주 섰다. 도현은 다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은은 그런 도현이 고마웠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봬요. 다은 씨.”
다은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답을 했다.
“네.. 오늘 고마웠어요. 그리고, 싫어하지 않아요. 좋은 사람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흘렀다.
다은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집은 민낯과도 같았다. 외부 사람들로부터 차단될 수 있는 곳이자, 무정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지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리 느껴졌다. 도현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 이 상황이 차라리 편안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 한편에 방치해 두었던 화분을 떠올렸다. 그날 도현이 준 화분은 흙만 채워진 빈 화분이었다. 왜 빈 화분을 준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은 화분은 다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다은은 화분을 손에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화분에서는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아주 작은 싹이 트고 있었다. 손에 든 화분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은 싹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지, 마음속에 기대와 불안의 감정이 뒤섞였다.
이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씻고, 출근 때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한 뒤, 침대에 누웠다. 방 안이 고요로 가득 차자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밀려왔다. 오늘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며 서서히 잠에 들었다.
한밤 중, 그녀는 잠결에 무엇인가 자신을 응시하는 느낌에 깨어났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이 들어 눈을 뜨지 못했다. 한참이 지났을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거실로 향한 발걸음은 무정의 방까지 이어졌다. 분명 그 목소리는 무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