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은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이윽고 그들은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아닌 동네 슈퍼라 아이스크림 종류가 많지 않았다. 노인은 쫄깃한 팥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다은은 부드러운 초코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계산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다시 돌아가는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은은 노인의 부탁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그저 따뜻한 말에 감사함을 전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다은 양, 현이 놈 어떤가? 사람 괜찮지?”
다은은 노인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금방 알아차려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도현 씨, 좋은 분이죠. 근데 저는.. 아시잖아요.”
“자네가 왜?”
“그거야..”
“14년전에 있었던 일 말하는겐가? 그 일이라면 사고사로 처리 됐잖나. 다은 양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알긴 뭘 안다고 그러나?”
“그래도.. 그 아이 볼 때마다 자꾸 생각도 나고요..“
“… 일찍 떠난 내 딸이 지금쯤 살아있다면 딱 다은 양 나이쯤 되었을거야. 만약 내 딸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겠네.“
노인은 멈춰 서서 다은을 살포시 안은 채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다은아, 괜찮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거야. 아무 잘못도 없는데 스스로를 그렇게 탓하며 버텨왔지. 넌 정말 잘해왔어. 이제는 네가 짊어진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도 돼. 마음속에 까맣게 타버린 재는 다 털어내고, 다시 웃고, 사랑하며 살아가거라. 나는 우리 딸이 행복해 하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다은은 노인에게 안긴 채로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달빛에 비친 눈물은 마치 그녀가 걸어온 인생처럼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픔이 눈물이 되어 함께 흘러나오는 듯했다. 오랜 시간 억누르고 견뎌온 감정들이 마침내 터져 나오며, 다은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안아주며 위로를 주고받았다. 노인은 오래전부터 딸 같은 다은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마침내 전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은은 그 마음을 느낀 듯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부모님 뵈러 다녀올게요.”
골목 모퉁이에 서 있는 두 사람 곁에는 봄 동안 피어난 꽃들이 여름의 따뜻한 빛 속에서 더욱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다은의 마음 또한 그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더욱 희망과 용기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