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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Oct 25. 2024

소설 <자생화> 13

다은은 여성이 떠난 후, 여성의 부탁에 따라 책을 빠르게 훑어 넘기며 84페이지를 찾아 천천히 나열된 문장들을 읽었다. 그러던 중 어느 구절에 눈길이 멈췄다.


*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는 걸 두려워 말자. 내가 나이기에,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


그녀가 늘 고민하고 슬펐던 이유는 분명했다. 친구의 부탁으로 찾아간 집에서 일어난 사건, 아기를 데려온 일, 그리고 그 직후에 일어난 부모님의 사고. 무정을 미워하고 도현을 밀어냈던 이유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나라서 지워지는 느낌’


모든 것을 잃은 그녀가 늘 느끼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말은 마치 다은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다은은 마음의 실타래가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덕분에 어젯밤 무정의 행동으로 복잡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오후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저녁이 되고,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고 다은과 도현은 월광책방에 갈 채비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도현 씨, 죄송한데 저 책들 좀 같이 옮겨줘요.”


“이 많은 책을 어디에 가져가시려고요?”


“책방 사장님 갖다 드리려고요. 책 정리하시면 책장도 빌 테니까 좀 채워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


“좋아하시겠네요. 아까 연락드려서 다은 씨도 같이 간다니까, 그만으로도 좋으신지 숨기질 못하시던데.”


“사장님께는 제가 정말 감사하죠. 제가 신세를 많이 져서..”


“신세요?”


“네. 말하기 민망하지만.. 제가 그 책방에서 많이 울었어요. 혼자 책 읽다가도 울고, 사장님이랑 대화하다가도 울고요. 왠지 나쁜 감정들은 항상 책방에 두고 오는 것 같아서 늘 죄송하더라고요.”


“다은 씨, 울보네요.”


다은은 도현의 말에 민망한 듯 웃으며 책을 옮기는 데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차에 책을 가득 채우고는 책방으로 향했다. 저녁 9시가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책방은 달빛이 일렁이듯 빛나고 있었다. 다은은 책방이 보이는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노인은 책방 앞 마루에 앉아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었다.


“사장님!‘


차에서 내린 다은은 노인에게 안기며 어린아이처럼 책을 가져왔다고 자랑했다. 노인은 그런 다은의 등을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세 사람은 잠시 마루에 앉아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노인은 다소 갑작스럽게 물었다.


“두 사람, 화해한 것이야?”


“할매. 사장님이랑 나랑 싸운 적 없어. 그날은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내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다은 양 울리면 내가 네놈을 가만 안 둘 거야! “


“할매 너무해요. 다은 씨 보다 나랑 훨씬 더 오래 알았으면서!”


세 사람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것처럼 웃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중, 다은은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것을 깨닫고 책을 옮겨야 한다며 일어났다.


그러자 노인이 다은을 제지했다.


“다은 양, 다은 양은  나랑 갈 곳이 있어. 현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현아, 잘 옮기고 있어라. 금방 다녀올 테니!”


다은과 도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을 크게 깜빡이며 어서 서두르라는 눈빛을 보냈다.


“뭐야, 나 두고 어디 가려고. 할매, 다은 씨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질투해요 나. “


도현은 말과는 다르게 이미 책을 나르고 있었다. 다은과 노인은 서점 주변 한적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저희 어디 가요?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은 무슨.. 다은 양 아이스크림 사주려고.”


“아이스크림이요?”


“그래. 현이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여자들끼리 땡땡이 좀 쳐볼까 해서 수작 좀 부려봤지!”


노인은 천방지축 한 꼬마처럼 신나서 말을 했다. 다은은 그런 노인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근데, 나 하나만 부탁해도 되나, 다은 양? “


“네, 그럼요. 사장님 부탁은 다 들어드려야죠 제가.”


“부모님 산소, 이제 그만 가보지 그래. 부모님이 그렇게 되신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나. 무정이 때문도 다은 양 때문도 아니야. 사고였으니까. “


다은은 말없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정의 존재를 숨긴 채 본가에 갔을 때, 흐린 날씨와 점점 내리는 비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저녁이 되자 비는 점점 거세졌고,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다은은 혹시라도 부모님이 자취방에 들리실까 봐 연신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궂은 날씨에 딸을 혼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결국 그녀를 차에 태워,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던 중,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쏟아졌다. 차는 미끄러지며 가드레일에 부딪혔고, 앞 좌석은 완전히 찌그러졌다. 그렇게, 다은은 부모님을 잃었다.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고 느낀 다은은 꼭 죽은 남자가 복수를 하는 것 같다는 괴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서 무정을 제 손으로 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했다. 다은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동안 산소를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만약 그날 부모님이 데려다줄 것을 끝내 거절했더라면, 무정을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 집에 가지를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늘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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