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은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나에게 기쁨과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모두 가져다 줄 수 있는 음식은 단연코 피자다.
피자가 나에게 기쁨을 주었을 때는 피자에땅에서 피자메이커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을 때이다. 피자메이커로 일해본 것은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고 내 손 맛이 서툴렀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만든 피자가 맛있게 먹어진다면 그 보다 더한 기쁨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 메뉴를 내가 과연 만들 수 있는 걸까, 피자를 굽다가 태워버리진 않을 까와 같은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며 하나하나 만들었는데 익숙해져서 곧 잘 만들어냈다. 피자를 재빠르고 완성도 있게 만들게 되어 빵 반죽도 만들게 되었는데 안에 스트링 치즈를 넣고 잘 발효된 밀 반죽으로 감싸면 치즈 크러스트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살라미, 피망, 올리브, 불고기, 햄, 옥수수콘 등 피자 위에 올라가는 토핑 들을 빵 반죽위에 톡 하나씩 올리다 보면 개수가 너무 정 없다 싶어 몰래 1개씩 더 올려줄 때도 있었다.
오븐에 들어가기 전 완성된 피자의 모습은 아직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20분간 오븐에서 노릇노릇 구워져 나오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색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금새 나까지 배고파서 먹고 싶어 지며 예쁘게 옷을 차려 입은 나만의 피자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볼 때면 피자가 오븐에 구워져 나온 따끈함처럼 내 마음도 오븐 온도처럼 따스하게 비춰졌다.
이와는 반대로 나에게 슬픔을 준 피자의 모습은 피자 자체가 아니라 피자를 만드는 가게들의 소멸이었다.
일단 내가 피자메이커로 일했던 피자에땅은 현재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길 안 쪽으로 들어가서 네 번째 상가에 위치하고 있던 그 곳은 사라져 더 이상 빵 굽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련함과 씁쓸함, 그 때의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지 못한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또한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 우리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샐러드바를 즐기고 피자를 함께 나눠 먹으며 이야기했던 미스터피자나 피자헛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인데 이제는 그 추억을 떠올릴 수만 있고 실제로 같은 추억을 나누러 갈 수는 없기에 조금은 슬펐다.
물론 피자에 대한 좋은 기억과 추억들이 존재하는 것에 반해서 노여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방 안에서만 있어야 했고 많은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편하게 쉬고, 먹는 것에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잘 섭취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자 내가 먹고 싶어하던 피자를 배달시켰다. 배달 온 피자는 내 방으로 전달이 됐는데, 가장 먹고 싶어 하던 피자임에도 불구하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이전에 맛있게 먹던 맛처럼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피자의 따끈따끈한 냄새도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생각과 다르게 나의 입맛은 그 생각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아파서 목소리도 안 나오는 내가 가엾기도 하였으며 세상에서 맛있는 피자를 맛있게 먹지 못한다는 것에 노여웠기도 하다.
하지만 피자는 아직 나에게 여전히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음식이다.
친구들과 함께 한 조각씩 나눠 먹는 재미가 있고 가족들과 함께 대화하며 먹는 행복도 존재한다. 피자메이커로 일했던 피자에땅, 그리고 추억이 서려 있는 미스터피자, 피자헛과 같은 피자 체인점은 다소 여럿 눈 앞에서 사라졌지만 아직 많은 분들이 피자의 맛을 연구하고 계시며 그에 대한 열정으로 피자 맛집은 수도 없이 많이 탄생했다. 그동안 피자를 찾아 먹으러 다니면서 나만 알고 싶은 피자 맛집을 하나씩 마음속에 새겨 놓았다. 피자 맛은 변함없이 맛있고 나는 변함없이 피자에 즐거워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