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9살 차이 나는 유독 나를 이뻐했고 지금도 나랑 가장 친한 큰언니가 있다. 나의 아이들까지 이뻐해 주는, 주위사람들한테 천사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언니다. 나 역시 엄마한테 안 하는 이야기도 다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각별한 언니고, 이쁜 조카들 중에서도 언니의 아들을 특별히 좋아한다.
언니시대에는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왕사탕을 주었다고 한다. 언니도 그걸 먹고 싶었지만 참고 나이차이나는 예쁜 동생인 나를 주려고 집에 가져와서 그걸 먹는 나를 보는 게 너무 좋았다고 한다. 내가 이뻐서 업고 다니다 논두렁에 빠져 죽을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언니말이 본인도 이뻐했지만 나를 집 밖에 데리고 나갈 때마다 동네사람들이 이쁘다고 동그랗게 몰려와 동생이 어떻게 될까 봐 집에 빨리 데려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듯 2남 4녀 중 막내딸인 나는 가족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당시에는 눕히면 눈을 감는 인형이 유행했었다. 아버지께서는 날 주려고 그 귀한 인형을 사다 주셨다. 그 인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세상을 어렵게 살다 돌아가신 분이다. 1924년 갑진년생은 전쟁희생 세대로 일본군대 한국군대에 끌려다니며 오랜 기간 전쟁을 겪은 세대로 유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도 총알이 옆에 떨어지는 주위 무수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신 힘들었던 전쟁터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아버지가 어릴 때는 금성골 갑부집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부잣집에서 자랐다고 당고모가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독선생 모시고 혼자 학문을 배우신 할아버지께서 본인만을 아신 삶을 사시고 재산관리를 못하셔서 자식들한테 가난을 물려주고 가셨다고 한다. 많이 배우시지도 못하고 전쟁에 너무 오랜 기간 끌려다니다 사회에 기반 없이 나와 가족을 돌보느라 고생하셨다. 정이 많아 눈물도 자주 보이시고 자식들을 너무 이뻐한 분이셨다. 본인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식들을 주는걸 더 좋아하셨던 술도 좋아하시고 노래도 좋아하신 한량이셨다.
덕분에 엄마는 더 고생을 하셨다, 그래도 어려움 속에서도 두 분이 큰소리로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엄마는 12살 차이 나는 아버지를 만나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큰집 맏며느리로 집안어른들이 모이면 음식 차리고 유기그릇을 닦느라 너무 고생한, 시집살이를 너무 심하게 하신 분이다. 시어른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평생 일을 하고 사셨다.
나는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 엄마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플 때 밤잠 안 자고 옆에서 간호해 주신 엄마가 생각난다. 나는 내 자식한테 그렇게까지 해주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막내딸이고 결혼 전까지 같이 살아서 결혼 후에도 많은 시기 가까운 데서 살아 엄마가 나를 의지 많이 하셨고 나랑 제일 가깝게 지내셨다. 사위들 앞에서 다리도 펴고 앉지도 않으셨던 돌아가실 때까지 새색시 같은 고운분이셨다. 엄마생각하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셔서 가슴 아픈 부분이 생각이나 돌아가신 지 4년 정도 된 지금도 엄마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이라 자랄 때 내 위의 형제들은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늦게 태어난 나와 남동생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원하는 건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셨다. 나는 자라면서 부모님한테 큰소리로 혼난 기억이 없다. 공부하란 소리를 들은 적도 없이 자랐다. 남동생은 부모한테 공부하란 소리 한마디 듣지 않고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선하고 행복한 우리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은 큰오빠다. 큰오빠는 중학교 때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가다가 뺑소니차에 교통사고가 나서 너무 긴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머리를 다쳐 성인이 되어서도 초등학교지능으로 인생을 어렵게 살다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힘듦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오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려움이 있었기에 나는 인생의 소중함을 더 알게 된 것 같다.
부모님은 주위에서 법 없이도 살분들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엄마께서는 우리 가족이 선하게 살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 함부로 하거나 힘들게 한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하셨다. 본인 인생에서 그걸 체험하고 사셨다고 걱정하지 말고 인생 살라고 자식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덕분에 결혼 전에는 큰 어려움에 당면한 적 없이 하고 싶은 걸 하며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외모 덕분에 증권회사에 다닐 땐 거래소의 최진실이란 별명도 있었다. 전철에서 언제부터 지켜보았는지 매일 나를 보았다고 만나고 싶다는 편지도 받았다. 전철에서 따라 내려 전화번호를 묻는 남자들이 많아 당시 전철 표 파는 곳으로 도망가서 직원들한테 도움을 많이 청했다. 집 앞 전철사무실 직원들이 나를 알정도였다. 어두우면 부모님이 하루도 빼지 않고 마중을 나와 계셨었다. 요즘은 sns등이 있어 그런 시대가 아니지만 우리 때는 남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전화번호를 따려고 많이 따라올 때였다. 밖에 나가면 따라오는 남자들이 많아 길에 다니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좀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남녀 관계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여지를 줄까 봐 이성과 단둘이 차 한잔을 마시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했다. 주위 남자 직원이 나를 보고 자기가 나였으면 만나자는 남자들 다 만나보고 얻어먹고 차고 얻어먹고 차고 할 텐데 왜 아무도 안 만나고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여자든 남자든 앞뒤가 다른 사람을 싫어하고 무례한 사람을 싫어한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긍정적이다라는 말과 현명하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