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서로 다른 삶 속에서 살다가 결혼이라는 테두리에 둘이 들어와 살다 보면 싸움이 생기게 된다. 남편과 나는 서로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아 이성의 생각의 다름을 알지 못해 결혼 후에 서로를 이해 못 하고 어떻게 서로를 다뤄야 하는지를 몰라서 남들 안 싸워도 될 부분에서 싸운 적도 많은 것 같다. 연애 경험이 많으면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듯싶다.
임신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암걸리신 아버님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셔서 인지 시댁으로 들오라 하셨다. 신혼집을 놔두고 남편이랑 방배동시댁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아주버니와 형님 조카랑 둘이랑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큰집은 아주버니가 대학원 다니며 결혼해서 대학원등록금부터 생활비까지 시부모님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상황이라 처음부터 시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아주버니 연애할 때 둘이 놔두면 아무것도 안될 것 같아서 형님의 빚을 갚아주고 결혼을 시켰다고 하셨다. 그리고 형님은 대학 나와 학원 등을 했는데 빚만지지고 과외 같은 것도 시간을 제대로 맞춰가지 못해 오래 하지를 못하는 사람인데 목사님 딸이라 허락하셨다고 하셨다. 시어머님 말씀이 목사님 딸이라 베풀 줄 알았는데 받을 줄밖에 모른다고도 하셨다.
내가 결혼했을 때 형님이 나에게 시부모님 험담을 많이 해서 형님과 함께 며느리들끼리 힘을 합쳐 시댁의 시집살이를 이겨내야겠다 생각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그게 아닌 걸 알았다. 시아버님은 나를 너무 좋아하셨다. 시아버님이 나에게 "큰애(형님)가 어리석어 살면서 네가 고생할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암이 회복되면 나와 같이 살고 싶어 하셨다. 시어머니도 나에게 잘해주셨다. 그렇다고 해도 내 살림은 신혼집에 그대로 놔둔 채 시댁에서 시부모님이랑 형님네랑 같이 사는 건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결혼한지일 연도 안되었고 임신을 해서 직장도 다니는 상태였다. 형님은 욕심이 많아 나에게 "동서는 자기네 잘 살려고 직장 생활하는 거잖아"하면서 일이 있어 조금 늦게 퇴근하는 것도 나에게 늦게 온다고 눈치를 줬다.
남편은 형님이 집안식구들 모두랑 사이가 다 안 좋으니 나라도 잘 지내길 바랐다. 남편 작은 누나랑은 누나가 명절 때 친정 와서 일을 안 하고 며느리인 자기만 일한다고 아주버니랑 한편이 되어 내가 시집오기 전 크게 싸웠다고 했고 계속 사이가 안 좋은 상태였다. 집안사람들이 큰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집안이 망했다고 할 정도였다.
후에도 큰집은 시댁 재산과 권리를 다 차지하고, 혼자된 아픈 시어머니를 버리다시피 해서 시어머니가 화로 돌아가셨다고 주위에서 이야기들을 듣는다. 시어머니 장례식 때 남편 작은 아버지께서 나에게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돈 없는 남편 만나 고생 많았지?". 하시고. 형님한테는 "너 장례식 끝나고 나 좀 보자"라고 안 좋게 이야기하셨었다.
나는 대가족이랑 살다가 결혼을 한 거여서 밖에서 혼자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혼밥이 유행할 때도 아니었다. 그때 처음으로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서서 떡볶이 기를 먹고 시댁으로 퇴근했다. 시댁 들어가서 밥 먹는 것이 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첫 아이 낳기 한 달 전에는 직장에서 산후휴가 받고 나서는 시댁에서 시댁 근처 병원에 입원해 계신 아버님 간호하기 위해 왔다 갔다 했다. 병간호는 힘든지 모르고 진심으로 열심히 했다. 아버님을 간호하고 집에 들어와 방에서 잠깐 쉬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본인 아이들만 보고 집에만 있던 형님이 커튼을 가져간다고 그랬던가 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와 커튼을 열고 해서 불편했다. ' 막달돼서 잠깐 쉬는 것도 못 보겠다는 건가?''하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형님은 나랑 스타일이 다르다. "시집에서 사는 건 다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형님성격이니까 같이 사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시부모랑 살면 내가 말 듣기 전에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내가 스스로 더 힘들게 살았을 거다. 남편이 결혼 전 웃으며 형수는 시어머니가 못한다고 뭐라 하면 "새댁이 다 그렇죠"해서 시어머니가 더 갑갑해했다고 했다. 나는 아버님 병간호하러 막달에 땀 흘리며 왔다 갔다 했는데 형님은 본인애들 돌보느라 병간호커녕 애들이랑 같이 늦게까지 자고 시어른들 있든 말든 늦게까지 안 일어나서 어머님이 어이없다고 말씀하셨다.
병문안 오셨던 시댁친척어르신이 나를 보시더니 "애가 배가 저렇게 부른데 친정을 보내지 병문안온 손님들이랑 같이 울게 만드냐 태아한테 안 좋게"라고 이야기하신 분도 있었는데 시어머니랑 형님은 친정에 보내주질 않았다. 형님은 양수가 터지고 가도 된다고 어이없는 소리를 했었다. 아이를 낳아본 사람들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출산 예정일 전날 친정으로 갔다. 내가 친정 갈 쯤엔 시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해 혼자 안방에 누워계셨다. 시아버님이 부르시면 다른 사람들은 잘못 듣고 내가 달려갔었는데 내가 아기 낳으러 가면 아버님이 누워서 가족들을 불러도 못 들을까 봐 머리맡에 놓을 종을 사다 드리고 왔다. 아버님은 그때가 나를 보는 게 마지막인 줄 아셨는지 아이 낳고 쓰라고 돈봉투를 주시며 우셨었다. 첫아이 낳고 2주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 시기는 나에게 산후조리할 시기라 친정엄마는 애 낳고 바로 움직이면 나중에 몸이 아파 안된다고 걱정하셨는데 나는 초상을 치르고 장지까지 갔었다. 큰누나도 그 시기에 첫아이를 낳아 오지 않았는데 나는 아버님생각에 내 몸은 신경 쓰지 않고 달려갔다. 우리 아이들을 보셨으면 가장 이뻐하고 사랑해 주실 우리 가족의 아군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