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문이 열리자, 다른 공기가 서서히 흘러들어왔고, 그 앞에 창훈이가 서 있었다.
“너 여기 있었네. 빨리 나와”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고, 숨을 몰아쉬었다. 단호한 목소리에 이끌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 아직 얘기 중이야.”
혜주가 손목을 세게 붙잡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맞아, 몇 년 만에 만났는데..."
“그럴 시간 없어. 너 때문에 저렇게 된 거야”
창훈이가 말을 끊고, 시간이 흐를수록 밖의 사람들처럼 굳어 가던 내 몸을 돌려세웠다. 등 뒤로 처음 마주했던 사람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 네가 바꿀 수 있어, 아직 살아있거든"
창훈이는 방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 한쪽 구석에서 낡은 가방을 집어 들어 던졌다.
“네 거 맞지?”
창훈이가 움직일수록 방은 형태를 잃어갔다. 혜주도 그러했다. 한 겹씩 벗겨지듯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혜주의 모습은 그저 웃고 있는 예쁜 모습이었다는 걸. 우리가 만나던 그때, 혜주와 나는 한 번도 서로의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좋은 얘기만, 재밌는 일만 하려고 애썼다.
-혜주에게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 다시 만난다면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혜주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방을 빠져나왔지만, 꽉 잡혀 있었던 손목의 아픔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은 듯 온 머리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이제는, 더 이상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른 꺼내, 시간 없어”
창훈이가 테이블 앞을 바삐 움직이면서 소리쳤다. 감상에 빠졌던 생각을 얼른 내려놓고 쭈그려 앉았다. 가방을 열고 손을 더듬거리며 잡히는 대로 물건을 꺼냈다. 장난감부터 낡은 공책, 교과서, 서류 뭉치들과 책들이 가방의 크기에 맞지 않게 쏟아져 나왔다. 도저히 쓸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거 말고, 여기 있을 거야”
창훈이가 가방을 뺏어서 직접 물건을 꺼냈다. 맑은 물이 담긴, 작고 반짝이는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나는 이게 필요할 것 같은데?"
다시 손을 뻗어서 가방을 확인했다. 아까보다 더 깊어진 듯한 가방 안에서 손이 허공을 저었다. 창훈이가 꺼낸 건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가방에 손을 넣었다. 잠깐의 손 짓 끝에 꺼낸 건, 작은 천주머니 몇 개와 반짝이는 수저들, 그리고 따뜻한 음식이 담긴 그릇들이 나왔다. 당연히 가방에 있으면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쏟아졌다.
“이게… 뭐야?” 어이없다는 듯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창훈이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꺼낸 것들로 테이블 위를 바꿔갔다. 굳어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입술이 떨리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떤 이는 숨을 크게 들이켰고, 누군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한 사람씩 미약하게 움직임을 더했다.
“다 네 가방에 있던 거야. 꺼내는 방법을 몰랐던 것뿐이야”
그 말에 어떤 책임감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창훈이를 돕기 시작했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음식을 바꿔 놓았다. 상한 접시를 밀어내고, 따뜻한 그릇을 올리고, 말을 걸었다.
“왜... 이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거야?”
내 질문에 창훈이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대답했다.
“잊힌 사람들이야. 기억에서 밀려났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도 못한 사람들. 누군가에게 한때는 소중했지만, 지금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여기에 남겨진 사람들.”
방에서 혜주와 나눴던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여기서는 다 괜찮잖아. 네가 생각한 그대로 멈춰있어. 변하지 않아.
“우리는 이 방을 조금씩 바꿔왔어. 누군가가 와서 음식을 바꾸고, 말을 걸고, 사람들과 만날수록 이 방은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어.”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깨어난 건 아니었다. 어떤 얼굴은 여전히 색을 잃은 채 굳어있었다. 하지만 생기를 얻은 몇몇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 안에는 희미한 고마움이 스쳤다. 부서진 감각들과 말라붙은 의지, 침묵 속에 머물던 시간들이 아주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손에 전해지는 그릇의 온기와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의 눈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전거를 타도 메워지지 않던 마음속 구덩이를 메워 주는 듯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도와야 할 사람들은 테이블의 수 보다 한참 많이 남아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창훈이의 눈과 마주쳤다.
"이제 가도 돼. 또 다음에"
"... 고마워 덕분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일이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들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다시 돌아와 말을 걸어주기를.
"여기 오는 길은 항상 똑같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면, 언젠가 이 방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생길 거야.”
"꼭 다시 올게"
천천히 자전거에 손을 올리자 터널의 어둠이 다시 주변을 감쌌다. 길게 느껴졌던 터널의 출구가 눈앞에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갈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페달을 밟았다. 느리지만, 아주 균일한 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