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
저는 50대가 넘어 결혼에 성공한 꽃중년, 중년 신혼을 즐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재혼이 아니냐는 의구심 어린 말들을 건네곤 했는데 ‘처음’ 하는 결혼이라고 강조하던 경험이 듭니다.
저는 연애를 책과 영화로만 배워온 모태솔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결혼이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던 한 노총각을 구원했다고 하는데 저는 다른 의미로 저를 구원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미혼을 기혼으로 만든 신분적 변화가 아니라 치유와 껍질 벗기라는 두 가지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치유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결점 키가 작고 흙수저 출신의 집안 환경과 잘생긴 외모라고 보기엔 부족하며 뚱뚱하기까지 한 저의 몸매를 생각하며 누가 나를 좋아하겠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연애조차 안 해본 지 기억조차 안나는 연애세포 제로의 아저씨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의 아내가 된 여성과 만나면서 내가 생각하는 단점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 자신감은 좀 더 나의 위축된 생각과 마음을 개방적으로 바꾸더군요.
나에게만 맞춰진 선호와 취향을 내 연인에게 맞춰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걸리긴 했지만 껍질은 벗겨지고 좀 더 나다운 나가 되어 있더군요. 나다운 나란 무엇이었을까요?
상대에게 사랑을 얻기 위해 나를 표현하게 되더군요.
대한민국 거의 모든 남자는 전통적으로 감정을 표하고 사랑의 언어, 행위를 드러내놓고 말한다는 것은 좀처럼
힘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하니
자신감도 생기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이 나타났습니다.
영화와 책으로만 배운 연애는 정말 한계가 있습니다.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실전 속에서 숙성을 시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냥 넘겨버렸던 결혼과 부부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 세상 숭고하고 참다운 사랑은 티브이 속에 있고 로맨스 소설에만 존재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으로는 가슴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나를 편안하게 호강시켜 줄 사람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커플들이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를 받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런 현실 때문에 결혼이라는 허들, 장래물을 넘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신분제가 없어진 사회라고 말하지만 돈으로 만들어진 계급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고 사람의 귀천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회가 돼버렸죠.
그럼 우리는 결혼과 연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우리는 결혼과 연애를 통해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지배하는 결혼관을
‘경제적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결합’이라고 하면 너무 속물적으로 보는 것일까요?
예비신랑신부의 경우 조건을 따질 땐 상대집안의 재력을 우선으로 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니까요.
경제적으로 자유롭다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 이상의 형이상학적 개념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돈은 힘이고 권력입니다. 다소 물질이라는 것에 판타지가 결합이 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고
어디 든 지 갈 수 있고 모두가 나를 추앙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죠.
그래서 일반인들 다수가 겉으로는 사랑이라는 숭고한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결혼은 그 경제적 자유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이는 상류층은 이미 자신들이 누리고 있으니 영속적으로 유지하거나 후손들을 통해
이 부를 상속시키고 싶어 하죠.
그래서 비슷하거나 더 나은 경제적 바탕을 가진 사람들과 짝짓기를 하고자 합니다.
상류층을 제외한 사람들은 신분 상승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경제적 스트레스를 덜거나
경제적 이익을 달성하기 용이한 상대를 원합니다. 그래서 조건을 보는 거죠.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위치는 기본이고 외모와 인간적 미덕까지 갖추길 원합니다.
이런 배우자가 이 세상에 존재나 할까요?
그런데 모두 이런 정도의 배우자는 내가 만날 수 있다거나 향후에라도 기대 가능하다고 믿는 거죠.
결론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사회적 신분의 상승에 몰려 있다 보니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 말하자면 관계와 소통의 측면을 간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경제적인 조건을 보지 말자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서 경제적인 이익 그 이상의 충족감을 누리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결혼과 연애는 물질적 추구가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나의 넘치는 재능이나 이점을 상대에게도 베풀어 줄 수 있는 인간적 교감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내가 그리고 상대가 완성되는 결과물로서의 최종단계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들 말하죠. 결혼을 해야만 어른이 된다고요. 그 말은 결혼은 두 사람이 좀 더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됐고 완성된 인격체가 꾸려가는 일획 일점 어긋나서는 안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공동 작품이고 협업의 산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보니 실수가 있다면 바로 잡아가고 상재가 잘하는 부분은 맡겨두고 상대의 호흡을 지켜보며 같이 붙이고 떠어가는 조각 행위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루시앙 보베(Lucien Bovet) 박사는 "결혼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인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밑에서 양육받아온 환경과는 너무 다르죠.
남인데 부모보다 가깝고 때론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결심까지 하게 되는 숭고한 관계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가치관 마저 다른데 서로가 살기 위해서 이 험난한 경쟁시대에서 같이 서로의 손발이 묶인 채로 한걸음 한걸음 달려가야 하는 도움닫기 같은 종목이 결혼입니다.
결혼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에게 배우는 너무나 소중한 학교이자 보금자리이자 쉼터입니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일까요?
가장 큰 것은 다름에 대한 수용일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사소한 것부터 싸우게 됩니다.
가사 문제에서 육아 그리고 습관 그리고 신체적인 특징의 차이마저도 바라보면 서 “ 그럴 수도 있겠다” “ 상대방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 성공적인 가정생활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라고 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배움의 가치는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이제 부부라는 공동체가 되면서 불가능해집니다.
서로 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재산은 내 것인데 내 것만이 아닌 공동 소유, 좋게 말해 공유가 되는 것입니다.
만 약 시간과 공간, 물리적 육체적인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한 상대가 불만을 가진다면 이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이 공동의 개념이 애매한데 자유로움 속에 구속이 느껴져야 하는 데 이게 결혼 생활의 줄타기 같은 요소입니다.
작가 칼릴 지브란이 쓴 결혼에 대하여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일부분을 소개하자면요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힌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 놓을 때에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신의 고요한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중약)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
선 자랄 수가 없나니.
기독교 성경에서는 “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안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니라”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니 누지 못할지니라 “ 했지만 연합 속에 각자 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 풀기 힘든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구속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로움 속에 구속됨의 감정 때론 그 구속된 듯한 감정이 아름다운 소속감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신뢰 속에 책임이 수반될 때 가능해진다고 봅니다.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내 말과 행동에 일정한 믿음을 주는 것이고 부부 공동체 유지에 있어 나의 의무를 다 한다는 것이겠지요.
혼자 살면 그런 책임감은 불필요합니다. 내 식욕과 지출, 내 외모, 취미에만 활용하면 되니까요.
부부 사랑을 배우다라는 책을 쓴 게리 챕먼은 자기 중심성(self -centerdness)을 버려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결혼 문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 안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결혼은 타인 배우기의 학교입니다. 타인에 대한 다양성과 다름을 수용하고 나 아닌 타인을 책임지는 것이 결혼에서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봅니다.
성인이 되고 부모로부터 독립을 한 이후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인 부부생활이 만족스럽고
타인 배우기에 익숙해진다면 더 나은 사회생활이 가능한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타인 배우기가 성공한다면 나를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왜 그럴까 라는 의구심에서 다툼, 타협, 동정심 의지함 같은 다양한 실패와 좌절, 기쁨등의 감정들을 경험하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자기정체성의 확립 과정입니다. 타인과의 부대낌을 통해서 비로소 나다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 비참한 이혼이 끝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삶은 아닙니다.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고 행복해지는 과정이니까요.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그 과정 속에 교훈을 얻는 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굳이 저한테 바람직한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냐고 묻는 다면 누군가가 말한 것 같은데 같이 있으면 그냥 편한 사람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좋아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결혼은 완성이 아니고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연애는 결혼으로 가는 예비 학교쯤 될까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연인을 향해 떠나는 여행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