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경험? 산경험?

20대 나 자신과 우연한 만남

by Dreamer

새해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내가 오랜 세월 써온 일기를 전자책 형식으로 디지털화화해서

보관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나의 대학 초년기 일기를 꺼내 보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빛나던 시기로 꼽는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내 개인적으로는 가장 젊었음에도 바쁘고 삭막한 나날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막 20대를 맞이한 나는 가장이던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와 사별이라는 것이 정확히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볼 틈도 없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처음 시작한 경양식 서빙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의 일기 내용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때 나는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하는 주인을 대신해서 홀서빙과 돈을 받는 일을 했습니다.


1월 19일 토


가을 ** 사장이 계산이 틀리다고 돈을 바닥에 내 던졌을 때 그리고 그 돈을 주워 계산이 틀림없음을 확인했을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내 존재가 불신과 불성실의 결정체이고 무능력의 소치란 말인가? 사람을 사귀고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나에게 무척 힘들고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나는 고용인일 뿐 당사자가 사장이고 주인이라는 점과 연장자라는 사실 때문에 나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질 정도로 대한 적이 많았다.

생각건대 그것이 인생공부라면 말없이 불만 없이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더 이상의 고통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1월 22일 화


조금만 더 누워 있겠다고 하다가 1시 15분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무척 화가 나신 듯했고 나 자신은 약간의 미안함과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고 하루 12시간씩 일하는데 정말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종업원이라는 입장에서 일일이 주인아저씨 비위만 맞추다가는 내명에 못 살 것 같다.

담배 살 돈으로 집안 식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란다. 내가 담배를 왜 피우는지도 모르면서..


1월 25일 금


무척 착잡하다. 사장이 정말 그런 사람이려니 해도 정말 울분이 터짐을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고 해도 배고파 밥 먹는 사람 앞에 놓고 “너는 아침밥도 안 먹고 오냐 ” 하는 건

정말 인간이하의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사사건건 인상 쓰는 건 그만두더래도 전에 있던 아르바이트 생과 비교하는 건 더욱 견디기 힘들다.


일기라는 것을 들여다보니 나는 이미 잊은 일들이 아주 세밀하게 쓰여 있고 “ 뭐 이런 것으로 고민을 했을 가” 싶기도 해서 미소를 짓게도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드는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그 당시 느꼈던 사회생활의 경험치가 누적되고

숙성이 되고 내 삶 속의 결정체로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험이 성찰이 되고 성숙한 지혜가 되었던 것이죠.


그 때문인지 과거의 내가 중년이 된 지금의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경험과 깨달음의 밧줄로 단단하게 이어져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그때만큼 외모적으로 빛나지는 않더라도 인격적으로도 삶의 태도로도 성숙했음을 깨닫습니다.


가끔씩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여행이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사람은 그냥 발로 걸어가면 되고 부모님 덕에 자전거라도 마련한 사람은 자전거를 고쳐가면서 목적지를 향해 가겠죠. 그렇다면 부자 부모를 만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동차로 쭉 뻗은 고속도로 주행을 하겠죠.


어떤 사람의 삶이 축복된 것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자동차에서만 안락하게 보고 느끼는 부자들만의 세상이 그리 부럽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나의 20대는 원만하게 포장된 편안한 길로 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바꿔 볼까요.

막내 조카 그러니까 여동생의 막내아들이 오랜만에 부산으로 여행을 내려와

저녁을 함께 하는 기회를 갖었습니다.

이미 나보다 훌쩍 커버린 덩치 큰 남자아이를 바라보니 시간 참 빠르구나 라는 생각도 들면서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지도 궁금해졌습니다.


내 조카만의 이야기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동안 마시지 못했던 술을

2025년 마지막 날부터 신년까지 마셨다고 하더군요.

워낙 친구들을 좋아하니 만날 때마다 술을 만취가 되도록 먹는다고 합니다.

외삼촌인 나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연달아 술을 마실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건강을 해칠까 걱정되고 친구들과 배운 술버릇이

나쁜 방향으로 습관이 될까 우려도 됐습니다.


우리 조카는 원래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학을 진학하게 됐다고 하는 데

좀 더 넓은 곳에서 경험도 쌓고 부모를 떠나 진정한 독립을 실천해 보면 좋겠다고 돌려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카는 새로 진학한 대학이 재미없다면 부모님 사는 가까운 곳으로 대학교 편입 시험을 치르겠다고 하더군요.


분명 언젠가 우리 조카는 멋진 삶을 개척하고 살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아직은 작은 세상에서 길들여진 좁은 시야로 판단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디 제 조카 한 사람 만의 문제일까요? 우리 청소년들이 너무 지쳐있고

스트레스를 풀 탈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떠나온 여행에서 술로 허비하는 경험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기 자신과 만나보는 살아있는 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권동환 여행작가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82개국을 여행하면서 방구석에서 떠나는 유럽 아시아 문화기행이라는 책을 쓴 작가인데 그에게 진진하게 물었던 생각이 납니다.


여행을 어떻게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요?


그의 대답은 혼자 떠나라는 말을 했습니다. 혼자 떠나서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 삶의 의미와

나를 온전히 바라보기를 권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삶을 견디는 기쁨이라는 책에서도

삶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에는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

정신적 혹은 이상적인 것들에 대해 개인들이 저마다 맺고 있는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맛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외적인 삶을 익숙하게 뒷밭 해 주던 것들이

사라지거나 파괴되었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진가 를 드러낸다.

희귀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큰 시험에 처해서야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것을 취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여행을 통해서 또는 소비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국내여행보다는 해외여행이 가성비가 좋다 보니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다양한 곳으로 추억 쌓기 경험을 합니다.


배움과 미래에 대하여 (저자 :류대성, 왕지윤)라는 책을 보다 보니 우리 사회는 사진을 찍고

비디오로 촬영하면서 직접 체험을 대체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경험의 죽음이고 경험에서 성찰로 넘어가고 지혜에 이르는 고전적인 배움의 단계가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수많은 경험은 수십수백 장의 사진으로만 남는 것이죠.


코스피 5천 시대를 맞이하며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편안함과 안락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마음속에 진짜가 사라져 가는 아이러니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돈이 지배하는 가상공간 속에 고정관념과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 속에서 발버둥 치는

또 다른 트루먼쇼의 트루먼들 일수도 있습니다.


이미 시나리오에 쓰인 어쩌면 강요된 편안함과 안락함에 중독이 돼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으려는 수많은 젊은 세대가 거대한 스튜디오 세트장을 부수고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죽은 경험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느끼고 실패하더라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살아있음을 몸소 느끼고 만끽하며 살기를 기대합니다.


혼자 걷는 길 /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다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지혜나

능력은 없다.

월요일 연재
이전 12화결핍은 나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