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나의 힘

가난한 아버지에게 바침

by Dreamer

"불행은 마치 사유재산처럼 차곡차곡 쌓여 결국엔 행운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결핍은 언제나, 또 다른 나를 자라게 한다는 것을 "


이 해인님의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자인 이해인 작가는 희귀병인 쇼그렌 증후군을 앓고 있는 엄마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본인도 루푸스 질환으로 고생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떠올렸습니다.


이해인 작가의 책을 읽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나를 성장시킨 결핍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핍이 내 마음의 어두운 그늘이 되기도 했었고 결핍을 극복하려고 꿈을 꾸게 된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결핍의 자리를 채우거나 대체를 했다면 낭만적인 추억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부끄러움 자체였고 숨기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 나를 관찰해 보면 나는 집안의 형편보다는 좀 눈이 높았고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태어나서 초등학교 시절 까지는 세상 행복했던 아이로 셋방을 전전했던 집안의 형편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정말 행복하게 놀고 즐기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수도공사를 하는 인부를 하셨는데 그냥 '막일'라고 하는 막노동 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우리 한국사회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한국과 비숫했던 면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가난은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었습니다만 나의 아버지는 각별하게 고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친할머니가 막내 고모를 낳으시고 산후조리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2남 2녀의 자식들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거나 하며 종살이를 하며 입을 덜었습니다.


아버지는 남의 집 농사를 도와주시며 쌀이나 곡식을 세경으로 받아 생활을 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국민학교도 2학년 중퇴가 전부였고 어린 나이에 입담배를 말아 피우며 놀았습니다. 그나마 한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 다행일 정도여서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은 몸을 쓰는 '막일'이 전부였습니다.


80년대 초반에 우리 집 네 식구가 셋방에 살았을 때 방이 하나였고 식구 네 명이 한방에서 잤습니다. 나름 위로라고나 할까 주변 친구들도 셋방 살이를 제법 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까지는 그런대로 구김 없이 살았는데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사춘기가 시작이 된 것 인지 기가 죽어 살았습니다.


학년초기에 담임 선생님들이 가정 형편 조사를 하는데 그때는 직접 적어내는 것은 아버지의 직업이나 주소 정도였는데 손을 들고 대답해야 하는 항목들 때문 좀 많이 창피했습니다. 텔레비전은 그 당시 다 있었으니까 괜찮은데 전화기가 있는지 물어볼 때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습니다.

전화번호를 꼭 적어야 하는데 주인집의 전화번호를 적어내곤 했습니다. 만약 친구나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줄 때 집주인 전화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만 전화기가 없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나만 없는 것 같고 전화기 없는 사람 손들라고 하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런 문제도 아닐 수 있는 문제 가지고도 고민하고 가슴 떨려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정말 죄송한데 아버지의 직업을 적을 때 사실대로 못 적었습니다. 땅도 없으면서 농사라고 지었던 것 같고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직업란은 고상하게 보일 거라 생각했는지 무난하게 보일 거라 판단했는지 상업이라고 직업란을 기입했습니다.

막노동 노동자라고 하면 내가 또는 우리 집이 가난하고 무시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아버지의 직업란을 속이며 청소년기를 보낸 것 같습니다.


이른바 '막일'이라는 것이 비가 오면 쉬고 경기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까 겨울에는 연탄 배달을 아버지께서 하시며 생계를 이어가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학교 주변을 지나다가 연탄 배달하는 아버지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버지를 봤는 데 아버지는 나를 못 봈던 것 같습니다. 어찌나 창피하고 화끈거리든지..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런 내가 사실은 대학을 갈 형편은 아니었는데 우기고 우겨서 인문계 고등학교 와 대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릴 적 단점은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아이였다는 점인데 그것이 마음 한구석에 한시도 밝고 구김 없이 지낼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 집안의 부모님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돌로 짓눌러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내가 알아서 생존해야겠다는 생활력의 원동력이 되었을 듯합니다


누구나 부모님을 모델 삼아 살아야겠다거니 반대로 부모님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인데 나는 늘 잘 나가는 부모님을 둔 아이들은 꿈을 어떻게 꾸는지 궁금했습니다. 부모님을 롤모델로 삼을 수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떠올리면 아버지는 안쓰럽고 정말 복이 이렇게 까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학교 1학년때 간경화로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거든요. 대학교를 다니면서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한 번씩 옆에 있어보니 정말 고통스럽게 투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병원 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사람들의 인생에 있어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늘 주눅 들어 있었던 때를 생각하니 오래전 일이기도 하지만 어제 같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내면의 나는 늘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며 집안의 형편을 탓하며 살았던 것 같은데 외면의 나는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안 그런 척하며 살았겠지요


늘 꿈을 꾸었고 희망을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 같은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라 좀 더 머리를 쓰며 사는 작가나 선생님, 연예인, 방송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눈이 좀 높은 아이였던 거죠. 동네 어르신이나 동네 형님들조차도 나를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철이 없거나 아무렇게 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배움은 일천했지만 부모님은 늘 거짓말을 하지 말고 남에게 아픔을 주지 말고 늘 양보하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욕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에게 욕을 듣지 못하고 살았고 내가 폭력을 싫어하는 이유는 부모님에게 이렇다 할 매질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늘 주변 이웃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셨는데 빚은 절대 제때에 갚으셨고 신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흙과 땀에 젖은 작업복과 장화, 이곳저곳에 뭍은 진흙탕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단 한번 도 일하러 가시기 싫다는 말이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신용과 믿음의 중요성을 배웠고 아버지에게는 책임감을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이해인 작가의 책의 제목이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 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해인 작가의 삶을 보면 절대 다정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해인 작가가 다정함이라는 테마를 자신의 장점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랑받은 존재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돼 천성적으로 주어지거나 또는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캐릭터이자 성품은 다정할 수 있는 긍정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주눅 들고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긍정적일까 생각을 해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내 곁을 지켜줄 부모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생각과 꿈을 지지해준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소천해서 천국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를 보게 된다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요. 결핍과 부모님의 사랑은 나의 힘이었네요.


에피쿠로스의 핵심 사상은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과한 물질적 육체적 편안함의 넘침보다는 최소한의 필요한 충족된 고통 없는 마음이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봤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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