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상처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분노가 나는 지점을 적어보는 것이다. 특히 아이까지 키우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럼 아마 두꺼운 공책을 구해놔야 할거다. 욕도 좀 섞어가며 분노의 휘갈기기를 하다보면 그 안에 나의 상처가 드러난다. 그리고 나도 몰랐던 내 마음, 숨어있던 욕구도 빼꼼하며 고개를 든다.
분노 글쓰기는 그냥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해소되는 시원함이 있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글에서 고통의 패턴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처와 욕구를 숨기는데 천재적으로 진화했다. 외롭지만 괜찮은 척, 아프지만 안아픈척, 기다리고 있지만 쿨한 척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머리가 아닌 단전에서 감정이 폭발적을 쏟아나와야지만 내 안에 숨긴 나를 만날 수가 있다.
아래는 10년전에 쓴 내 일기의 일부분이다. 이 글들을 보면 내 고통의 정확한 패턴을 알수 있다.
2014년 10월 20일
남편이 "너구리 매운맛은 너무 매워." 라고 말했다. 순간 비난받는 기분, 공격받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라면을 사왔어. 제대로 골라왔어야지. 니 잘못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왜 골랐는지 황급하게 변명하다가 불연듯 화가 났다.
"그냥 좀 먹어! 사람이 왜이렇게 까다로워!"
남편도 나도 기분이 잡쳐버렸다.
2014년 11월12일
요즘 조금씩 자는 시간을 당기고 있는데 아이가 늦게까지 티비를 보겠다고 해서 화가 났다.
아침에 내가 자기를 일찍 깨우는 학대를 하게 만든다. 왜 일찍자지 않아서 내가 자기를 괴롭히게 만드는지 화가난다. 계획대로 되야되는데 안되니까 화가난다. 나는 계속 깨우는 시간을 당길건데 그럼 계속 수면 부족이 누적될텐데..
왜 이렇게 독하게 버티는건지.
독한 년.
2015년 8월 1일
... 물소리 사이로 아이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오늘따라 아무것도 해주기가 싫어서 "응" 대답만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뭐든 알아서 하겠지 싶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안방에서 손을 빨며 누워있다.
나를 보더니 폴리인형으로 역할놀이를 하자고 한다. 놀이를 시작했는데도 아이는 손을 계속 빨며 누워있다. 버리지 말아야지 했지만 오늘 또 아이를 버렸다. 사랑을 듬뿍 주겠다던 다짐은 지켜낼 수가 없다. 아이를 다 망친것 같다. 아이가 손을 빠는게 내가 잘못키워서 인것 같다.
난 왜이리 나락일까. 알콩달콩 아이와 사이좋게 지내는게 나에겐 왜이리 어려울까. 나와 내 엄마처럼 나와 내 딸도 원수지간이 될 것 같다.
어떤 패턴이 보이는가?
나는 니 잘못이야, 학대, 아이를 망쳤다는 표현에서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과 뿌리깊은 죄책감을 느껴진다. 어린시절 부터 가혹하게 비난 받아온 사람은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을 산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한순간 자신을 탓하던 손가락을 돌려 상대방을 공격한다.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너구리를 사달라고 한 남편에게, 자주 엄마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에게 축척된 분노를 쏟아낸다.
우리 아이는 많이 화가나면 이렇게 소리치고는 했다.
"엄마 나빠! 엄마 미워!!"
이불속에서 울고 불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있는그대로 쏟아낼때의 저말이 참 가슴이 아팠다. 마치 엄마는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불행한건 모두 엄마때문이라고 하는것 같았다. 아이의 투정과 울음, 가끔은 작은 표정하나 작은 머뭇거림까지 모두 내 탓으로 가져오던 나에게 육아는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당신은 아이가 저런 말을 하면 어떤 마음이 들것 같은가? 당신도 나와 같이 비난받는 기분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작은 실수에도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던 상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너무 많은 비난을 듣고 살아왔다. 당신은 늘 자신의 여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왔지만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생했다고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비난하며 살아왔다. 그 누구를 데려와도 당신만큼 잘 버텨낼 사람은 없다. 당신은 할만큼 했다. 당신 탓이 아니다.
혹시 "이제 넌 필요없어! 꺼져!" 라는 말로 들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많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눈빛으로 말로 행동으로 연결이 거부당했던 상처를 아이가 비춰주는 것이다. 실제로 버릇을 고치겠다며 아이를 문밖으로 쫒아내거나 보육원 앞에 놓고 오는 경우도 많다. 또 가족내에서 은근하게 한명을 왕따 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상처를 가진 사람은 늘 버려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외되는 마음을 느끼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타인의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간다. 당신은 너무 외로웠다. 아이에게 부모의 연결은 생명인데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런 마음을 안고 이만큼 살아낸 것은 기적이다.
신에게 분노를 표현해본 적이 있는가? 보복당할까봐 신에게조차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신이 안전하다고 믿을 때 비로소 신에게 분노할 수 있다. 마구 화를내고 투정을 부리고 나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기도를 드리고 의지하며 그 사랑에 기대는 것이 신의 큰 사랑이다. 신은 그렇게 조건없이 늘 우리를 기다려주고 사랑한다.
아이에게 엄마는 온 우주이고 신이다. 엄마를 믿기에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엄마 미워!" 의 말 뒤에는 "엄마 나 정말 많이 화가나.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줘" 라는 마음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아이의 사랑이 있다. 아이의 말을 내 상처에 빚대어 오해를 쌓지 말자. 내 상처를 자각하고 풀어내어 진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게 변화하자. 아이를 우리처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의 상처를 대면하는 성장의 시간이다. 기쁨도 있지만 당연히 고통스러운 순간도 많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모든 힘든 순간에 아이도 온힘을 다해 우리를 믿고 우리의 품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육아는 두 사람의 치열하고 거룩한 성장의 시간이다. 아이는 엄마를 절대 정죄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에게 전부다.
세상의 전부인 당신을 응원한다.
당신의 육아가 행복해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