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촌부가 된 최선생 Jan 03. 2023

미선로 교동길에서 12

마패봉 겨울 산행

수요 산악회에서 지령이 온 것은 달리는 차 안에서였습니다. 수요 산악회라고 하니 거창한 등산 모임처럼 들리겠지만 덕배 부부와 우리 부부 이렇게 딱 4명뿐입니다. 고사리 주차장에서 10시에 만나자는 메시지가 카톡에 떴을 때 나는 ‘고사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동네 뒷산에 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일기예보에서는 중부권에 적설량 1 정도의 눈이 내린다고 하여 겨울 산 눈꽃을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겠군, 생각하며 낭만 모드로 산행에 나섰습니다. 네이버 지도에 고사리 주차장을 검색하자 조령산 근처라고 알려줍니다.      

조령산이라면 며칠 전 갔던 수옥 폭포가 있는 산입니다. 수옥 폭포 옆길에 조령 3관문으로 가는 안내판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인생에서 어떤 관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무척 지난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순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관문 같은 것은 통과하지 않기로 의기투합했었습니다. 그런데 덕배는 오늘의 산행 코스가 조령 3관문 통과라고 합니다.     

일기예보에서는 영하 8도라고 했지만, 찬 바람 부는 조령산에서의 체감 온도는 영하 18도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의도 입지 않고 등산에 나섰습니다. 겨울 산행은 양말도 2켤레 신고 옷도 내피 외피를 따뜻하게 입어야만 한다는 안전 수칙을 그만 무시했네요. 게다가 나는 손발이 차서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얼음장처럼 얼어버렸습니다. 출발하기도 전에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등산대장 덕배는 가다가 힘들면 언제라도 말하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연방 레츠 고를 외쳤습니다.     

조령산은 한겨울 내내 내린 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등산화가 눈 속에 푹푹 빠집니다. 오르막 산길에서는 등산화 앞만 보고 걸었지만, 너른 길을 걸을 때는 여유롭게 설원을 감상하며 걸었습니다. 드디어 조령 3관문이 보입니다. 이곳은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넘던 문경새재 길입니다. 언젠가 문경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왔다 되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마주하니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덕배가 그 길이 단조롭다면서 마패봉으로 가자고 합니다. 마패봉에 오르면 사방팔방으로 확 트인 풍광이 비경이라고 합니다. ‘뷰에 살고 뷰에 죽자’라는 좌우명을 지닌 나로서는 곧 죽어도 고를 외쳤지요. 안내판을 보니 소요 시간 60분으로 나옵니다. 눈길이니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겠군요.     

그런데 우린 아무도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조령산을 동네 뒷산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아이젠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이 길이 등산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데 아이젠이 없으니 아이 젠장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를 외치는 덕배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찬바람에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손발이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위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온몸에 힘을 주니 땀이 난다고 합니다. 소음인인 나로서는 소양인인 아내가 부러워지는 순간입니다. 마스크가 얼어붙어 딱딱해지자 덕배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 줍니다.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즉각 받았습니다. ‘생존 앞에서 장사 없다’라는 옛 어른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계곡의 경사가 점점 더 가팔라지자 우리는 비상 회의를 열었고, 결국 위화도 회군 아니 마패봉 회군을 결단했습니다. 나이 먹고 산행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욱 힘든 법입니다. 눈 덮인 겨울 산행은 더욱 그렇습니다. 무릎의 고통은 뒷전입니다. 미끄러질까 염려하면서 그 두려움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자칫 미끄러지면 계곡 아래로 눈썰매 타듯이 주욱 빨려갈 것 같았습니다.      

고은의 시가 떠 올랐습니다. 

‘내려갈 때 느꼈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고통’     

선두에 선 덕배가 미리 자리를 잡고 등산화로 디딜 곳을 받쳐줍니다. 덕배 아내 미옥 씨와 나의 아내는 무서움도 모른 채 잘도 내려갑니다. 맨 뒤에 있던 나만 뒤뚱뒤뚱 겁먹은 채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마패봉 초입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안내판에 쓰여있는 마패봉이라는 세 글자가 내려와서 보니 그리 반가운 줄 몰랐습니다.     

구름에 가렸던 해가 나타나 축하의 햇빛 샤워를 선사합니다. 그 따사로운 느낌이 좋았습니다. 화장실 담벼락에 기대어 햇살을 받는데, 유년 시절 겨울 칼바람을 피해 담벼락에 숨어 온종일 햇살을 받던 순간이 떠 올랐습니다. 햇볕 좋은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과 김밥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등산 가서 라면 먹으면 행복해지도록 DNA가 저장되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막걸리라도 한 사발 걸치면 딱 좋을 텐데 그러기엔 너무 추웠습니다. 따뜻한 봄날 조령산에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안전한 마음으로 마패봉 정상에 올라 조령산의 비경을 감상해야겠지요. 

작가의 이전글 미선로 교동길에서 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