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매* 꽃 피우다
하얀 베 위에 붉은 혈흔을 처음 남기던 그때
감추고 싶은 수줍음이 볼우물 가에 피어
얼굴 붉히던 소녀는 붉은 쓰개치마를 둘렀다
솔잎 사이사이 거닐던 달빛 치마 위로
소녀는 첫 꽃잎을 피웠다
보제루 꽃살문 속 갇혔던 달은
보돕시 소나무 손을 잡고 뜰로 나서고
무심한 처마 끝 추녀는 단청의 그리움을 담았다
각황전에 흐르는 맑은 목탁 소리와
천수경의 한결같은 공경함에
제 한 몸 시름의 무게를 어찌하지 못한 고목은
힘겨워하면서도 가지를 의지하며 제 몸을 세운다
세월에 장사 없다며 굽은 허리를 주렁에 의지하여
내 허리고 발이라 하시던 할머니
머리엔 새하얗게 쌓이는 눈발 더 이상 이승의 꽃도 아닌 것을
인제 그만 가고 싶다며
낡아가는 주렁을 꼭 그러쥐시던 할머니가
이승의 삶을 의지하듯
고목은 그렇게 서로를 기대며 세월의 시간을 엮는다
독대 안 정한수 속으로 쏟아지는 달빛
부서져 내리는 월향
한 소쿠리 얹어 만든 월향초로 석등에 불을 넣고
스러져가는 몸뚱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공양한 노파의 세월
탑돌이에 풀어헤친 어리석은 헛된 욕심
기도로 합장한 세월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
사백 년 고목은 한 많은 그, 세월 안에 담았다.
슬며시 깨어나는 새벽 기운이 고요히 각황전 추녀를 스치면
새하얗게 센 이승의 꽃 날아오른다
붉은 순결이 가지마다 접은 날개를 펼친다
*202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화를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