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선호사상

#8. 왜 나는 또 이렇게나 나약한 거니?

by 영하

할아버지의 오빠를 좀 돌아봐 달라던 당부만 아니었으면 벌써 너를 버리고도 남았던 나였다.

너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얼마인지.

너를 나의 실수의 결과로 인정하고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채찍질하며 견뎌온 세월이 얼마인지.

그래도 내 아이의 아비라고 너를 어찌 이해해 보려 노력해 온 시간이 얼마인지.

이젠 내 아들까지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너를 나는... 참. 지랄도 풍년이다, 진짜.

이제 나는 너를 이해도 용서도 하지 않아야겠다.

실수에 결과란 없는 것이다. 그저 실수가 있을 뿐이다.

그 실수를 바로잡아 되돌려 놓아야 용서도 할 수 있던 것인데, 나는 그 실수를 결과로 인정하려 했으니 이렇게 비참할 수밖에. 초췌해진 나의 자존심을 끌어안던 나의 인내는 여기까지가 끝인 것 같다.

그 남자의 어머니는 말했다.


"남자는 정신만 차리면 된다. 정신 차리고 마음 잡을 수 있도록 네가 좀 더 잘해라."


그럼, 여자는 남자가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남자가 정신 차리고 마음 잡을 수 있도록 도와만 주면 되는 것이 여자인가요?

그동안 썩어 문드러져 가는 여자는 괜찮나요?

남자가 정신 못 차리면? 마음 못 잡으면?

모두 다 여자 잘못인가요?

던지지 못한 많은 질문은 타는 갈증으로 내 목을 넘어가고 있었다.






쉬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끝이라 마음은 먹었으나 생각 또한 많았다. 이혼한 부모를 둔 내가 이혼을 해서 내 아이를 나처럼 자라게 한다는 것이 맞는 것인지. 밤은 깊어져 가고 나의 시름도 깊어져 가고 겨울도 깊어져 갔다.

눈이 많이 내렸다. 밤새 쌓인 눈은 보이는 모든 것을 새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깨끗해서 어지럽던 내 마음도 좀 진정되려나, 어지럽던 많은 일들이 저렇게 깨끗하게 사라지는 일도 있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바램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서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웠다. 돌아오면서 문득 차오르는 눈물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늘 걸어 들어오는 운암동 뒷길의 하늘은 변함이 없다. 운암 시장 상인들이 많이 사는 곳. 커다란 대문들이 번쩍번쩍 떡 벌어진 곳은 아니지만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안으며 살아가는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골목들이 얽힌 뒷길. 그래서 늘 정다운 웃음이 오가는 곳. 시간이 사라지고 계절이 변하고 내가 변하고 있을 뿐. 운암동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시리다. 아들과 이 길을 걸으며 바라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던 노란 은행나무는 벌거벗고 서서 칼바람에 춤을 춘다. 가을엔 노란 옷을 입고 이파리 춤을 추며 나와 아들에게 웃음을 주고 이파리를 날려 선물을 주던 나무가, 이 겨울엔 휑하니 서서 바람 사이를 휘도는 칼바람에 나무 위에 얹혀 있던 흰 눈을 눈먼지로 만들어 배웅하며 춤을 춘다.

너도 나만큼이나 이별이 아프구나? 그래서 춤을 추는 거야. 그치?

너도 눈물이 나니?

너도 어지럽니?

나 왜 이렇게 어렵니?

세상 모든 사람이 나처럼 어렵니?

이혼. 하아. 해야겠지? 사람들은 그러겠지? 뭘 보고 배웠겠느냐고.

제 부모가 이혼해서 보고 배운 것이 뻔하지 않겠느냐고. 이혼 가정 자녀가 다 그렇지 않겠냐고.

하아. 세상이 왜 나한테만 이렇게 모지니?

왜 나는 또 이렇게나 나약한 거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뒷길의 차가운 횟빛 시멘트벽을 만져보고 휑하니 비어있는 빈 땅을 보며 황량하구나 한마디 비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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