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설정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관계에서 끌려다니지 않고, 함께 서는 힘(2)

by 모라


"엄마, 스마트폰 10분만 더 해도 되지?"


초등학교 4학년 서준이가 이미 한 시간째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한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아이는 "마지막 판만, 진짜 마지막 판만!"을 외치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아요. '이제 그만해야 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스마트폰을 빼앗으면 시작될 아이의 울음과 떼쓰기를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오늘 하루도 이미 충분히 피곤한데... "엄마도 맨날 폰 하면서 왜 나만 안 돼!" 아이의 항변에 결국 "아, 그래. 10분만 더..."라고 말하고 말죠. 거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넘어가 버렸네... 이게 맞나?'


혹은, 직장에서 동료의 과도한 업무 요청에 "안 돼"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나요?

친구가 또다시 약속을 어기며 변명할 때, 가족이 내 개인적인 시간을 침범할 때, 그 순간 마음속에서는 "이건 안 돼"라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실제로는 다른 말이 나오곤 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별일 아니야."


어릴 적 "네가 뭘 안다고!"라는 말과 함께 나의 의견이 무시당했던 기억이 있나요?

'싫다'라고 말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경험 때문에, 혹시 지금 내가 '단호함'이라는 경계를 세우는 것이 두려워진 건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할까 봐', '내가 너무 냉정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경계 설정을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경계는 사랑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더 단단하게 지켜주는 '따뜻한 선'입니다. 이 선이 있어야 우리도, 상대방도 관계 속에서 비로소 숨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선이 우리를 키운다

"안 돼." 이 한마디에 상대방은 처음엔 세상이 무너진 듯 실망하거나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아이라면 울음을 터뜨리고, 어른이라면 서운해하거나 당황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의 마음속에 이런 기록이 새겨집니다. "아, 이 사람은 이런 걸 안 좋아하는구나." "그럼 나는 이렇게 행동해야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이런 명확한 기준점이 생기면 상대방도 더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고, 서로에게 안정적인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일관된 기준 덕분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을 찾은 것과 같아요. 어디까지가 안전하고, 무엇이 적절한지 알게 되면서 관계 안에서 더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안정감은 우리가 스스로 행동을 조절하고, 자신의 충동을 관리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경계를 통해 비로소 자율성이라는 날개를 달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경계를 단순히 물리적인 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타인과 건강하게 관계 맺는 정서적·인지적 자기 보호막이라고 설명합니다.

경계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히 구분해 주고,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건강하게 분리하며, 내 선택과 타인의 반응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경계 없는 친밀감은 결국 친밀하지 않다 (No boundary, no intimacy)."라는 말이 있죠. 마치 온종일 붙어 다니는 친구 사이라도, 각자의 개인 공간이나 시간을 존중하지 않으면 결국 관계가 불편해지고 멀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모호한 친밀함은 결국 한쪽이 침범당하거나, 다른 한쪽이 끊임없이 희생하는 관계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경계를 세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존중하고, 상대방에게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할까 봐", "내가 너무 냉정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이런 마음으로 경계 설정을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그 깊은 뿌리를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의 과거 경험이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혹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경계를 무시당한 채 자랐던 경험은 없었나요? 어린 시절의 애착 패턴이 성인이 된 후 경계 설정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릴 적 내 감정을 무시당하거나, '싫다'라고 말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면, 어른이 된 지금도 나도 모르게 그 경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될 수 있어요.


또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맥락도 영향을 줍니다. 한국 사회는 "정(情)"과 "배려"를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집단을 우선하는 분위기, "싫다"는 말을 곧장 "이기적이다"로 받아들이는 시선, 권위주의적 질서에서 비롯된 '일방향적 경계' 등이 우리가 '따뜻한 경계'라는 개념을 체득하기 어렵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경계는 단순히 '말하는 기술'이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회복해야 할 감정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의 상처와 문화적 압박 속에서도 건강한 경계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다행히 심리학에서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경계를 찾아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제시합니다. 먼저 경계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 적용할 수 있는 단계적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에고 바운더리(Ego Boundary) 이론에 따르면 사람마다 경계의 '두께'와 '투과성'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울타리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너무 부드러운 경계 (스펀지형): 마치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타인의 감정이나 문제를 모두 흡수하여 쉽게 지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들어", "네 문제가 내 문제야"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좌우됩니다. 심리적 조종을 당하기 쉽고, "아니요"라고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너무 단단한 경계 (벽형): 높은 벽처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울타리입니다. 친밀한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특히 과거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며, "누구도 믿을 수 없어", "혼자가 편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당히 투과성 있는 경계 (스펀지형): 부드러운 경계와 단단한 경계의 중간 형태입니다. 때로는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완전히 휘둘리지는 않습니다.


유연한 경계: 상황에 따라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가장 건강한 형태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과는 이만큼 가까워져도 괜찮지만, 저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라고 상황에 맞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계패턴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많은 경우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학습한 생각의 패턴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이다", "좋은 사람은 항상 도와줘야 한다", "갈등은 나쁜 것이다"와 같은 생각들이 경계설정을 어렵게 만들죠. 이런 생각들을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사고로 바꿔나가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이런 심리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자신의 경계 패턴을 인식하고 점차 건강한 방향으로 조정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경계 설정 4단계: 심리적 자립의 길


경계 설정은 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심리적 자립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먼저 익히고,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어야 해요.


1. 자기 욕구와 감정 인식하기: 내 안의 신호등을 켜세요

경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마치 자동차의 경고등처럼, 불편한 감정들은 경계가 침범당하고 있다는 중요한 신호예요.


감정은 경계 침범의 알림이예요: 분노, 불쾌감, 불안은 모두 '여기까지가 내 한계야'라고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 중요해요.


또한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 어깨와 목의 긴장, 속이 메스꺼운 느낌, 머리가 무거워지는 감각. 이런 신체적 신호들은 때로 감정보다 먼저 나타나며, 경계 침범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보세요:

나는 지금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어.

그 말 듣고 마음이 조금 상했어.

그 행동은 나한테 불편했어.


이런 감정 표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정서 지능 발달에도 큰 도움이 되죠.


2.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정하기: '싫어' 뒤에 '그래서'를 붙이세요

"싫어!" 하고 감정적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원하는 결과와 실현 가능한 행동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시를 들어보면:

반복적으로 약속에 늦는 친구에게: "시간 약속이 잘 안 지켜지니까 속상해. 그래서 다음부터는 약속시간보다 10분 넘어가면 먼저 들어갈게."

업무 시간 외에 연락하는 동료에게: "퇴근 후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래서 급하지 않은 일은 내일 아침에 얘기하면 안 될까?"

과도한 부탁을 하는 가족에게: "요즘 내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스트레스가 심해. 그래서 이번에는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

이렇게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면, 상대방은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당신의 경계를 존중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3. 경계를 표현하는 '나의 언어': 비난 대신 '나'를 주어로 삼으세요

경계를 말할 땐, 상대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대신 '나'를 주어로 하는 자기표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전달법(I-message)'입니다.

"나는 이렇게 느껴."

"나는 ~이 필요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

예를 들어, "당신은 항상 늦어서 문제야"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내 말을 안 들어"가 아니라 "내가 말할 때 집중해서 들어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단호함과 진정성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가 거절할 수도 있어. 그래도 내 마음을 말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 이는 건강한 거절 수용 능력을 배우는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4. 경계는 반복하며 조정하는 것: 완벽함보다 유연함이 중요해요

경계 설정은 한 번 말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며, 관계는 계속 변하므로 경계도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내게 맞게 다듬어가야 합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이번엔 잘 안 됐네. 다음엔 이렇게 해볼까?" "너무 강하게 말했나? 다음엔 부드럽게 말해보자." 이런 자기 피드백을 연습하는 과정 자체가 '심리적 자립'의 중요한 훈련입니다.


경계 설정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과 성장의 과정입니다. 매번 조금씩 나아지면서, 점차 자신에게 맞는 경계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실천 팁: 경계를 익히는 작은 연습


하루 중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보세요: 아침 독서 시간이나 저녁 산책 시간처럼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예: "이 시간은 내 혼자만의 시간이야.")


"나는 ~이 필요해" 문장을 하루에 하나씩 써보고 말해보기: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더 중요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일기를 쓰면서 감정 기록하기: 하루 중 내 경계가 침범당했다고 느낀 순간, 그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를 기록해 보세요.


거울 연습법과 역할극: 거울 앞에서 경계 설정 상황을 상상하며 말해보거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역할극을 해보는 것도 효과적인 연습 방법입니다.


솔직한 자기표현 모델링: "나는 지금 이게 필요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자신의 필요를 표현하는 것은 최고의 교육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경계 설정하기

한국 사회에서는 "눈치"와 "배려"가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경계 설정이 더욱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 관계를 더 좋게 만들고 싶어서 내 마음을 전하는 거야"라는 프레임으로 접근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더 건강하게 만들려는 시도임을 강조

점진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알려가기

갑자기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조금씩 자신의 경계를 표현하면서 상대방도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돌봄의 중요성

경계 설정은 체력과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입니다. 평소에 자기 돌봄을 충분히 해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경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충분한 휴식, 규칙적인 운동, 좋아하는 취미 활동, 믿을 만한 사람과의 대화 등이 모두 자기 돌봄의 일부입니다.


경계가 침범당했다고 느낄 때는 그 감정을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일기에 기록하거나 상담자와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작은 성공 경험을 의식적으로 보상하며 자신감을 키워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경계는 사랑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오래 지속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내가 '싫다'라고 말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이 되길 바라신다면, 나부터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단호한 '아니요'를 말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사이에, 진짜 건강하고 단단한 관계가 자라납니다.


기억하세요, 경계는 선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튼튼한 그물망입니다. 그 그물망을 통해 서로를 보호하고, 진정한 친밀감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경계 설정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발전시켜 나가는 기술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작은 성공을 축하하며 꾸준히 연습해 보세요. 당신이 먼저, 그 경계를 지켜줄 수 있을 때부터 건강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모라의 정원> 다음화에서는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만드는 법"

갈등이 지나간 뒤에도, 마음은 이어질 수 있을까요? 경계를 세운 다음, 우리는 어떻게 더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다음에는 갈등 속에서도 함께 자라는 관계의 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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