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에 가지 않았다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by 명랑 숙영

30대 중반, 우울증이란 단어도 생소하던 시절, 난 우울증을 앓았다.

병원비가 없어 진단만 못 받았을 뿐 증상은 명확했다.

그 후유증과 결혼생활의 고초를 20여 년간 '셀프심리치료'로 버티고 견디었다.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치른 터라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딸아이는 내게 심리상담을 받아보라고 제안했다.

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 정도였다니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역시 자신을 객관화하기란 어려운 일인가 보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때 하던 일을 관두고 아픈 엄마를 돌보겠다며 친정으로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지병이 있었지만 나와 함께 버스를 환승하며 병원 갈 정도의 건강은 되었다.

2년 6개월 전 '임종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엄마는 대학병원에서 한 달, 요양병원에서 한 달을 견디고 기사회생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 건 무엇과 견줄 수 없이 기뻤지만 돌봄 난이도가 높아져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식사도 못하고 약도 못 챙겨드셨다.

때때로 화장실을 가지 못했고 실수도 하셨다.

난 점점 엄마 돌봄과 살림살이에 지쳐갔고 스트레스로 몸 여기저기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남동생 속옷까지 빨아 널 때 불쑥불쑥 화가 치밀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엄마를 좀 더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해 엄마의 요양보호사가 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돌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묵은 화병이 도져 자주 엄마와 부딪쳤다.

병마에 시달리던 엄마도 때로는 예민하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서로 베고 베이는 칼싸움 같았다.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엄마를 돌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형제들에게 통보했다.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그러니 알아서 하라고.

엄마는 나만의 엄마가 아니기에 형제들에게 역할분담과 적극적 돌봄을 요구했다.

이런 용기와 결단이 어디서 났는지 나도 놀랐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고 심리상담의 효과였다.


상담 후 일주일은 상담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의미를 해석하고 왜곡된 생각을 교정해 나갔다.

상담이 거듭될수록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았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머무를 수 없기에 지난 간 것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했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으려 결심했다.

새로운 경험이 두려울 때면 '방탄'의 '고민보다 go'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흥얼거렸다.

결정하기 어려우면 '고민'보다 'go'를 선택했다.

고민하다 미루기를 반복하는 과거의 나와 서서히 결별했다.

바른생활만 하던 내가 조금씩 변했다. 작은 일탈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니 소소한 즐거움이 따라왔다.

평안이 잦아들었고 행복감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1년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대나무 숲에 들렀다.

그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껴서였을까.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어찌 그리 열심히 다녔나 싶다.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내니 스스로 치유되었다.

그곳에서 심리상담을 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담사가 했던 말 중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기억해야 할 말을 떠올리며 메모했다.

멘털이 흔들릴 때 부여잡고 어떻게든 견디기 위함이었다.

딸아이의 제안을 흘려듣지 않고 대나무 숲으로 간 건 옳았고 좋은 결정이었다.

망설이다 그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자신의 문제에 함몰되어 좌초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거짓평화로 위장하여 '난 괜찮아'라며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


이젠 ‘독립된 개체’로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고 싶다.

느리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활기차게 성장 발전하는 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세상의 잣대로는 실패한 인생일지언정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박노해 시인의 '가면 갈수록'이란 시를 좋아한다.

그중 특히 이 구절을.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들은

나를 더 푸르게 하였다.


가면 갈수록 나 살아있다.


이 시구처럼. 나 살아있다. 그게 중요하다.

대나무 숲을 나온 지 5개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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