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집 <나는 별아저씨>에서
풍요한 상상력으로 사물과 현실에 꿈과 아름다움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시는 세계에 대한 참신한 인식과 삶에 대한 황홀한 번뇌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 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듯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비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 정현종, <갈 데 없이……> -
옛날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빵 하나 나 하나
빵 둘 나 둘이 있을 뿐이다
정신도 육체도 죽을 쑤고 있고
우리들의 피는 위대한 미래를 위한
맹물이 되고 있다
최근의 밤하늘을 보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별들은 자기들의 빛으로
가슴 깊이 감싸주고 있다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하여
유언(流言)* 같은 별빛을 던지고 있다
- 정현종, <최근의 밤하늘> -
*유언: 떠도는 말.
지난해는
참 많이도 줄어들고
많이도 잠들었습니다 하느님
심장은 줄어들고
머리는 잠들고
더 낮을 수 없는 난쟁이 되어
소리 없이 말 없이
행복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 납작한 벌판의 찬 흙 속에
한마디 말을 묻게 해 주세요
뜬구름도 흐르게 하는 푸른 하늘다운
희망 한 가락은
얼어붙지 않게 해 주세요
겨울은 추울수록 화려하고
길은 멀어서 갈 만하니까요
당신도 아시지요만, 하느님.
- 정현종, <냉정하신 하느님께> -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정현종, <떨어져 튀는 공처럼> -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날으는 새의 날개가 느끼는
공기
그 지저귐이 느끼는
내 귀
에 흐르는 푸른 공기
귓속에 흐르는 날개
모든 것들의 경계의
기화(氣化)
서로 다른 것의 모양 속에 녹는다
네 모양이 내 모양
내 모양이 네 모양이라며
날개와 바람
날개와
바람처럼……
인제 다시 떠나야 한다
이 세상의 깊음 속으로……
- 정현종, <이 세상의 깊음 속으로>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물질과 허깨비만이 왔다갔다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아.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버린다. 그 문드러진 팔다리고 나는 힘차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과의 타협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저 지독한 마약(痲藥)이 필요하다.
- 정현종,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노트 1975> -
나무들을 열어놓는 새소리
풀잎들을 물들이는
새소리의 푸른 그림자
내 머릿속 유리창을 닦는
심장의 창문을 열어놓는
새소리의 저 푸른 통로
풀이여 푸른빛이여
감격해본 지 얼마나 됐는지.
- 정현종, <감격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