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집 <포옹>에서
맑고 아름답다는 것, 이것이 정호승 시가 갖는 첫째 덕목이다. 이것뿐이라면 그의 시는 즐겁고 쉽게 읽히는 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맑고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데서 오는 깊은 고뇌와 짙은 아픔이 있다. 이것이 정호승 시의 감동의 원천이 되고 있는 더 큰 덕목이다. 한편 그의 시가 극히 감성적이면서도 전혀 감정의 낭비나 표현의 장황함이 없이 절제된 형상과 표현을 성취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우리 서정시의 한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툭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 정호승, <빈틈> -
외다리 재두루미 한 마리
남은 한쪽 다리를 길게 쭉 뻗고
얼어붙은 하늘을 고요히
날고 있다
저수지 위에 든 겨울 낮달이
울음을 그치고 그 뒤를
고요히
따라가고 있다
-정호승, <낮달> -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 정호승, <부러짐에 대하여> -
아침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길을 걸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
누가 또 고요히
말없이 소리치면
내가 가장 먼저 힘껏 돌을 던지려고
늘 돌멩이 하난
손에 꽉 쥐고 길을 걸었다
어느 날
돌멩이가 멀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거리에 있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두 데리고
나를 향해 날아와
나는 얼른 돌멩이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다
- 정호승, <돌멩이> -
봄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초등학생들의 맑은 발소리를 듣는다
봄눈을 맞으며 보리밭을 밟는 아버지의 다정한 발소리를 듣는다
햇살을 보고 살며시 웃음 터뜨리는 아침 이슬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한순간 정신없이 퍼붓는 소나기에 나뭇잎들이 장난을 치며 목욕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들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참매매들의 요란한 합창 소리를 듣는다
절벽에 부딪혔다가 슬쩍 웃으면서 물러나는 수줍은 강물 소리를 듣는다
가랑잎들이 굴러가다가 사람들 발에 밟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오솔길을 기어가는 달팽이들이 사람들의 발에 소리 없이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번개 몰래 심심하면 먹구름을 때리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엄마를 찾아 산그늘로만 산그늘로만 날아다니는 아기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빛과 별빛이 서로 손을 꼭 잡고 잠드는 소리가 들린다
- 정호승, <수화 합창> -
흙 묻은 감자를 씻을 때는
하나하나씩 따로 씻지 않고 한꺼번에 다 같이 씻는다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감자를 전부 다 넣고
팔로 힘껏 저으면
감자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면서 흙이 씻겨나간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도
흙 묻은 감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과 같다
나는 오늘도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내 죄의 감자를 한꺼번에 다 집어넣고 씻는다
내 사랑에 묻어 있는 죄의 흙을 씻기 위해서는
죄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게 해야 한다
흙 묻은 감자처럼
서로의 죄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위해서는
- 정호승, <감자를 씻으며> -
뼈로 만든 낚싯바늘로
고기잡이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신석기시대의 한 부부가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 섬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뼈만 남은 몸으로 발굴되었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사진을 찍자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수평선 쪽으로 슬며시 모로 돌아눕기도 하고
서로 꼭 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곤 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자꾸 사진만 찍고 돌아가고
부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조가비 장신구만 안타까워
바닷가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적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 정호승, <포옹> -
당신도 속초 바닷가를 혼자 헤맨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다로 가지 않고
노천 횟집 지붕 위를 맴도는 갈매기들과 하염없이 놀다가
저녁이 찾아오기도 전에 여관에 들어
벽에 옷을 걸어놓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잠은 이루지 못하고
휴대폰은 꺼놓고
우두커니 벽에 걸어놓은 옷을 한없이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무인 등대의 연분홍 불빛이 되어
한 번쯤 오징어잡이 배를 뜨겁게 껴안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먼동이 트고
설악이 걸어와 똑똑 여관의 창을 두드릴 때
당신도 설악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같이 묵묵히 등을 쓸어주는
설악의 말 없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바다가 보이는 여관방에 누더기 한 벌 걸어놓은 일이라고
걸어놓은 누더기 한 벌 바라보는 일이라고
- 정호승, <누더기> -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별들이 쉬어가는 숲이 되기를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나는 왜 당신의 의자 한번 고쳐주지 못하고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난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 정호승,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 기도> -
길이 없을 때 물길을 따라간다
길을 찾다가 길을 잃고 말았을 때
터벅터벅 물길을 따라 걷다가
느릿느릿 산굽이를 따라 돌다가
해가 지면 어떠랴
길은 물을 만들지 못하나 물은 길을 만든다
강가의 돌멩이 속에도 물이 흐른다
작은 저녁 별 속에도 푸른 물길은 굽이쳐
보라
사람들이 길을 다 버리고 물길을 따라간다
결코 가고 싶지 않았던
기어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슬픈 인간의 길을 다 버리고
물의 길을 따라가는
어린 물고기를 따라간다
- 정호승, <물길> -
벽에 걸어두었던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빈 벽이 된 벽이 가만히 다가와
툭툭 아버지처럼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준다
못은 아직 빈 벽에 그대로 박혀 있다
빈 벽은 누구에게나 녹슨 못 하나쯤 운명처럼 박혀 있다고
못을 뽑으려는 나를 애써 말린다
지금까지 내 죄의 무게까지 견디고 있었던 저 못의 일생에 대해
내가 무슨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벽에 걸어놓아야만 벽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내가 벽에 걸려 있어야만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스러져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캄캄한 내 눈물의 빈방에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빈 벽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는 벽이 되었다
- 정호승, <빈 벽> -
내 무거운 짐들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버리고 싶었으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결국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온
아무리 버려도 뒤따라와 내 등에 걸터앉아 비시시 웃고 있는
버리면 버릴수록 더욱더 무거워져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비틀거리면 비틀거릴수록 더욱더 늘어나 나를 짓눌러 버리는
내 평생의 짐들이 이제는 꽃으로 피어나
그래도 길가에 꽃향기 가득했으면 좋겠네
- 정호승, <꽃향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