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보낸 한평생

내가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는 까닭

by 꿈강

1989년부터 쭉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살아왔다. 충청도의 어느 작은 도시이다. 태어난 곳도 아니다. 고향도 아니다. 순전히 직장 때문이다.

국립사범대학 프랑스어 교육과를 1985년에 졸업했다. 그때는 국립사대를 졸업하면 임용 시험 없이 교시로 임용되었다. 헌데 프랑스어 교사 수요가 많지 않다 보니, 교사 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하여 국립사대에 프랑스어 교육과가 없는 이곳으로 임용 신청을 한 다음 입대했다. 1987년 6월에 제대했다. 제대 후 2년 여의 지리한 기다림 끝에 이윽고 프랑스어 교사로 임용이 되었다. 1989년 9월 1일의 일이다.


뛸 듯이 기뻤다. 백수 생활 청산의 기쁨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으리라. 지금 살고 있는 소도시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걸리는 읍소재지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의 첫걸음마를 뗐다. 한 학년에 3학급씩 있는, 아담한 규모의 시골 고등학교였다.


학생들은 대체로 순박했다. 물론 가끔 인상이 험악한, 내 앞에서도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내뱉는, 덩치는 거의 산만 한 남학생들도 있었다. 허나 그들도 순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학생들은 생소한 프랑스어 수업을 비교적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들어주었다. 그들이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교사가 신선한 패기로 침을 튀겨 가며 수업하는 광경을 호기심으로 지켜보았을 수도 있을 터이다.


10월 말인지 11월 초인지 확실하진 않은데, 놀라운 광경과 맞닥뜨렸다. 교실은 물론 교무실에도 난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톱밥을 압축해서 만든 장작을 때는 난로라고 했다.


1980년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로서는 시간의 퇴행을 보는 듯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모든 교실에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10년 후의 고등학교 교무실에 톱밥 장작 난로라니! 하여튼 그땐 그랬다.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그토록 컸다.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 시점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꽤 크지 않은가.


잘 잊히지 않는 또 다른 놀라운 광경이 있다. 어느날인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갔다. 문을 열고 교무실로 들어갔는데, 한 선생님이 학생 한 명을 혼내고 있었다. 그 선생님은 학생과 교내 생활지도 담당 선생님이었고, 그 학생은 품행 불량의 대표 주자격인 학생이었다.


내 자리에 막 앉으려는데 갑자기 호통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뺨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선생님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그 학생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그 학생이 코에서는 코피가 콸콸콸 쏟아졌다. 그 선생님은 두루마리 휴지로 학생의 코를 틀어막은 다음, 몇 차례 더 뺨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학생에게 무어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 학생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학생은 행동거지가 하도 거칠어서, 대부분 선생님들이 건드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상태였기에 나의 놀라움이 배가되었던 것 같다. 그런 학생을 그렇게 순한 양으로 만든 그 선생님에게도 놀랐고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거칠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그 학생이 그런 상황에서 얌전히 있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요즘 같았으면 사달이 나도 크게 났을 터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 탈없이 지나갔다. 끔찍한 폭력의 현장을 목도했지만, 초임 교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교사도 그 선생님을 말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학생과 교내 생활지도 담당 교사는, 필요하면 그래도 된다는 또는 그래야만 한다는 학교의 묵인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선생님을 말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이든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되니까. 그때는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말릴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듯싶다. 교사들 사이에는 다른 교사의 행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묵계 비슷한 게 있다. 하지만 말리는 게 옳은 일이 터이다. 아니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반드시 말릴 것이다.


나에게 국한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현장을 목도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 장면이, 어떤 경우에라도 학생들을 때려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질게 훈육을 받은 그 학생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내가 아는 한 전혀 변화가 없었다. 자기를 마구 때리며 훈계를 한 그 선생님 앞에서는 얌전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선생님이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예전과 똑같이 어긋나갔다. 종종 더 막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후로 수십 년 교직 생활을 해 오면서,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자칫 잘못해서 흥분하면 나도 그렇게 학생을 마구 두들길 수도 있겠기에, 그렇게 해 보았자 효과는 별무신통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회초리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터이다. 폭력은 폭력은 낳을 뿐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원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폭력을 통해 일시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얻은 것이 아니다. 곧 모든 것이 원래의 위치로 환원되거나 더 좋지 않은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학교 사회에서의 폭력은 어떤 경우에라도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백안시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내가 초임 교사 시절에 목격한 것과 같은 물리적인 폭력은, 지금 시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학교 어디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채로 행해지는 폭력이 있을 수도 있다.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 번 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형태의 폭력도 행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매순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기 전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점검한다면 우리 학교 사회는 한결 성숙해지지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살아온 / 사는 / 살아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