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 사는 / 살아갈 이야기
35년 가까이 살아온, 고향 같은 나의 삶터
35년 가까이 살아온 곳을 떠나려 한다.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고향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 국어 사전을 뒤지니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리운 곳'이 고향이라고 쓰여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은 국어 사전의 고향에 대한 정의, 그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도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이라고 답할 듯하다.
1989년에 지금 사는 이곳에 첫발을 들였다. 그때까지 이곳은 나에게 그저 지도상에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스쳐 지나간 적도 없었다. 순전히 직장 문제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직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충청도의 어느 작은 도시이다. 그 당시 인구는 대략 12만 명, 지금 인구는 대략 20만 명. 인구가 는 건 아니고, 도농 통합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된 것뿐이니 인구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래도 도시의 모습은 제법 바뀌었다. 처음 왔을 당시, 아파트 단지가 2~3개뿐이었는데 지금은 도시 전체가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수 차례의 택지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봄마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야트막한 구릉지들은 아파트 촌으로 탈바꿈했다. 그 와중에 떼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떼부자가 되었다는 어떤 사람에게, "아이고, 수 억대 부자가 되었다면서요?"라고 하자, 그 떼부자가 벌컥 화를 냈단다. 수 억대 부자가 아니고, 수십 억대 부자라면서. 벌써 20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 떼부자는 지금은 수백 억대 부자가 되었을까? 대개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과수원을 크게 하고 있던 사람들이 떼부자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땅이다, 땅. 대한민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의 현장을 몸소 체험했다고나 할까.
이곳에 발 들이자마자 겪은 에피소드 하나. 이곳 토박이인 직장 동료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들이 표준어를 사용한다며 자랑스레 얘기하곤 했다. 서울에서 살다 내려온, 내가 보기에는 분명 정감 가는 사투리를 쓰고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곳 말투가 서울 말투보다 좀 더 표준어에 가깝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뭐 근거가 있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믿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온 지 약 한 달 만에 서울 가서 친구 녀석들을 만났더니 친구들이 하는 말. "야, 너는 어떻게 단 한 달 만에 말투가 그렇게 촌스러워질 수 있냐? 완전 촌놈 다 됐네." 그렇다. 친구 녀석들의 말대로, 이곳 사람들이 쓰는 말이 표준어라 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이곳의 직장 동료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한 까닭은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에만 해도 이른바 표준어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의 특색이 살아 있는 말투, 이 얼마나 정겨운가. 지방마다의 맛깔난 사투리가 몽땅 다 사라지기 전에 사투리 보존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투리가 사라지는 건 우리말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다.
이곳에 살면서 먹은 음식 이야기를 해야겠다. 음식이 특별히 맛있느냐고? 딱히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이곳은 특징 있는 음식도 없고 맛도 별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잠깐 어느 지역에 여행을 가도 음식의 추억이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하지 않는가. 35년 가까이 살면서 뇌리에 인상적으로 남은 몇 가지 음식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보신탕이다. 물론 지금은 보신탕 먹지 않는다. 먹지 않은 지 어언 30년은 족히 되었다. 이곳에 온 초기에 잠깐 먹었는데, 기억이 강렬하고도 통렬하다. 자유당 시절부터 운영해 온 보신탕 집이 있었다. 가게 근처에만 가도 특유의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선배와 동료들과 어울려 몇 번 갔었는데, 음식에서 잡내도 나지 않고 구수한 맛이 났던 기억이 있다. 경북 구미에 사는 동서가 놀러 와서 함께 가기도 했는데 동서 역시 그 유구한, 전통적인 맛에 감탄했다. 그 동서도 지금은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또 이곳에는 칼국숫집이 유독 많았다. 조금 뻥튀겨 이야기하면 칼국숫집 순례단을 조직해도 될 정도로. 그중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단연 '이레 칼국수'였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칼국수 맛을 형용해 낼 수는 없지만, 담백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로 먹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맛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도,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맛깔난 국수를 내는데 손님이 많이 오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곤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가게 문이 닫혔다. 또 가게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아욱 된장 칼국수도 일미였다. 커다란 냄비에 된장을 빡빡하게 풀고 어마어마한 양의 아욱을 넣은 다음, 칼국수 중면을 넉넉하게 끓여서 먹는 칼국수였다. 아욱과 된장 때문인지 소화도 잘 되고, 특유의 구수한 맛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금세 장사를 접어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칼국수이다. 이 밖에도 칼국수 면에 콩가루를 넣어 고소함을 배가한 칼국숫집, 우리 밀만을 사용해서 칼국수를 만드는 집, 인공 조미료를 엄청 많이 쓰지만 조화로운 맛을 내는 집 등 인상적인 칼국숫집에 참 많았던 동네이다.
허나 무엇보다 이곳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은, 나의 가족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아내를 만났고, 역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고명딸이 태어나 자라났다.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이곳은 완전한 타향이다. 이곳과는 완벽하게 타인인 두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맺게 해 준 이곳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딸에게는 이곳이 고향이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 고향이라지 않는가. 우리 딸내미는 이곳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니 우리 세 명 중, 유일무이하게 이곳이 고향이다. 헌데 이곳이 고향인, 우리 딸이 나와 아내를 자기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딸이 이곳을 떠나 또 다른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곳으로 삶터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기꺼운 마음으로 이곳을 떠나련다. 딸이 있고, 손녀딸이 있는 그곳으로 간다. 또 다른 삶터로 간다. 가끔 아내 손을 잡고 이곳으로 와서 칼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