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김춘수 시 전집에서

by 꿈강

흔히 김춘수 시인의 시를 무의미 시라고 이야기한다.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실존, 존재의 세계 등을 끊임없이 탐구했기에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에 의미가 있든 의미가 없든 무슨 상관인가. 읽어서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지 그렇지 않은지만 따지면 될 일이다. <김춘수 시 전집>에서 몇 편을 골라 보았다. 분명, 이 중에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시가 있을 터이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 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 김춘수, <풍경>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



1

발돋움하는 발돋움 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 김춘수, <분수> -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저녁 한동안 가난한 시민들의

살과 피를 데워 주고

밥상머리에

된장찌개도 데워 주고

아버지가 식후에 석간을 읽는 동안

아들이 식후에

이웃집 라디오를 엿듣는 동안

연탄가스는 가만가만히

주리기의 지층으로 내려간다.

그날 밤

가난한 서울의 시민들은

꿈에 볼 것이다.

날개에 산홋빛 발톱을 달고

앞다리에 세 개나 새끼공룡의

순금의 손을 달고

서양 어느 학자가

Archaeopteryx(아르카이오프테릭스)*라 불렀다는

주라기의 새와 같은 새가 한 마리

연탄가스에 그을린 서울의 겨울의

제일 낮은 지붕 위에

내려와 앉는 것을,

- 김춘수, <겨울밤의 꿈> -


* Archaeopteryx(아르카이오프테릭스): 시조새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 -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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