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시집 <버드나무 껍질에 세 들고 싶다>에서
이 시집에는 작고 여린 생명에 대한 따뜻한 상상력이 흘러넘친다. 시인의 정감 어린 시선은 언제나 보잘것없고 내팽개쳐진 것들에게 머무는데, 세심하고 활달한 그 눈길은 금세 그것들의 아름다움의 핵심을, 그리고 그것들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포착하고 이끌어낸다. 어쩌면 '녹색' 상상력이라고 명명해 볼 수 있는 시인의 상상력은, 그리하여 아직은 우리 곁에 펄펄 살아 있는 자연의 힘을 채집하여 퇴락한 사물들에게 생동감 넘치는 생기를 부여한다.
작은 나무들은 겨울에 큰단다 큰 나무들이 잠시 숨 돌리는 사이, 발가락으로 상수리도 굴리며 작은 나무들은 한겨울에 자란단다 네 손등이 트는 것도 살집이 넉넉해지고 마음의 곳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큰애야, 숟가락도 겨울에 큰단다 이제 동생 숟가락들을 바꿔야겠구나 어른들이 겨울 들녘처럼 숨 고르는 사이, 어린 숟가락들은 생고구마나 무를 긁어먹으며 겨울밤 고드름처럼 자란단다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복(福) 자가 씌어진 숟가락 세 개를 방바닥에 내놓으신다 저 숟가락이 겨우내 크면 세 자루의 삽이 될 것이다
쌀밥을 퍼올리는 숟가락처럼 나무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한 뼘 두 뼘 커오를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흰 눈이 쏟아지고 홍역인 듯 항아리손님인 듯 작은 새들이 날아간다
하늘이 다시 한번 털갈이를 시작한다
- 이정록, <숟가락> -
모내기를 끝낸
논배미마다
도랑도랑 신이 나 있다
자라나는 옷을 입은 논과 논
그 단벌의 옷자락, 사이사이
이앙기 바퀴와 사람들의 맨발로
납작해진 논두렁, 빛난다
저 논두렁처럼
낮고 분명해야 하리라
딛고 지나간 발자국 옆에서
합장을 풀고, 싹을 틔우는 밤콩처럼
한 줌의, 식은 재를 열고
몸 세우리라
- 이정록, <처신(處身)> -
화톳불을 치우자 드러나는 마당의 속내. 아버지의 어두운 가슴을 삽질 한두 번으로 퍼올릴 수 있다니. 생살의 황토 윙에 눈물 점점 떨어진다. 한때는 동행이었던 감나무, 그 아래 발자국을 쓸어다가 군살을 입혀 준다. 끝내 태울 수 없는 것이 밥그릇이란 듯, 재티가 수북하다
언젠가 이 자리에 놓일 할머니의 화톳불. 아들 넷을 먼저 보낸 한 여자의 눈물샘이 웅덩이째 타오르리라. 삽질 한두 번으로 삼촌들의 숟가락까지 만나게 될 그날. 뼈마디로 묶인 몽당빗자루가 마당의 속살을 어루 만지리라. 유난히 검은 할머니의 눈동자가 사실은 그 울음 덩어리였구나. 가슴이 결리리라.
마당 밑 논배미로 일찌감치 떨어진 땡감들, 그도 그 울음 덩어리다. 안부터 몽땅 파 먹히고도 주렁주렁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 어미의 몸뚱어리를, 엎친 벼포기 사이에서 우러르고 있다. 생솔 연기 가득한 가슴속 아궁이를 그렁그렁 붉은 눈으로 훑어보는 늙은 감나무. 양볼이 무너진 까치밥 몇 알이 오래된 봉분처럼 가고 있다
- 이정록, <감나무> -
노스님께서
목욕탕 바닥에 가부좌 틀고 앉아
목탁인 양, 발바닥 받들어 군살을 깎아내고 있다
오래 걸어온 사람의 아름다운 발에서
한 꺼풀씩 책장이 넘어가고 있다
막 장화를 벗은 농부의 발바닥
그 육산(肉山)의 검은 골짜기처럼
빼곡한 글자들은 없지만
노스님의 발바닥에서 밥풀꽃이 피고 있다
그간 들이마신 흰구름, 켜켜이 몸 풀고 있다
- 이정록, <흰구름> -
문이 열려도 숨을 내쉬지 않고, 에어커튼을 치는 신형 냉장고가 있다 숨을 오래 참는 놈이 장수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기계까지 최대한 숨통을 조이다니 기술공학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체온이 올라갈 때에만 겨우 심장을 가동시키다가 숨통이 열리자마자 외부의 공기를 차단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절(氣絶)이 주식(主食)이란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손이며 팔뚝까지 에어커튼 안에 들기만 하면 순간 기가 질려 모든 숨구멍이 막혀버리니 그 어떤 물건이든 신선도가 오래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때로 기어코 빨리 썩어서 생각보다 일찍 출옥을 하는 독종들도 있지만 그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은 할복을 당하거나 박살이 나는 보복성의 막숨 한 번일 뿐 보글보글 맛깔 낼 때까지 뜨건 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금 냉장고 안으로 들어오는 같은 이름의 독종들은 안창 빙벽에 살을 에며 가장 긴 숨을 견뎌내야 한다
때로 에어커튼이 고장이 날지라도 놈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식히고 얼릴 줄을 안다 식탁이 있는 거실 냉장고 앞에 식솔들을 앉혀놓고 냉정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일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냉정함을 되찾으려 쉴 새 없이 들숨 날숨을 반복하지만 열받친 몸과 심장은 눈금 한 칸 내려서질 않는다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와 다시 독한 술을 꺼낼 때에도 놈은 아랑곳없이 에어커튼을 내리고 듬직함을 잃지 않는다 드넓은 바다부터 자잘한 텃밭까지 거느리고 계신, 위대한 가장(家長)이여
- 이정록, <냉장고> -
마늘종에는
마늘종 송아리라는 작은 마늘통이 매달린다
위아래에, 마늘은 왜
따로따로 씨통을 만들까
땅 속 굵은 밀알과
땅 위 송아리 사이에
질긴 끈, 마늘종이 있다
살아 눈총 맞다, 죽어
된장독에 처박히는 괴로운 종
해살 쪽, 꼬리 긴
마늘종 송아리를 뽑아내야
땅 밑 육쪽마늘이 실해진다
한 치 어둠도 괴로워
지상으로 퍼올렸던 젊은 날이 시들며
아랫도리 알싸해진다
하지만, 그 마늘종 송아리를 씨앗으로 묻으면
쪽 없는 한 통 되마늘을 만날 수 있다
지하로만 내려갈 수 없었던
마늘종 송아리의 나날들이, 마늘밭에 가득하다
- 이정록, <마늘밭을 지나다> -
가시만으로 가볍게 겨울을 건널
다섯 살배기 대추나무 두 그루에
무밭 한 뙈기가 걸쳐 있다
저, 솜털가시 싯푸른 무 줄거리들
눈비 맞으며 말라가리라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 이정록, <대추나무> -
영덕식당 아주머니가
청국장 백반을 이고 온다
신문지 한가운데 둥근 투가리에서
김이 폴폴 오르고, 그걸 맛보겠다고
하느님이 눈발이 되어 뛰어내린다
하느님도 무게가 제법인지
아주머니가 허리를 펴고 멈춰 선다
여관 신축 공사장 삼층으로 오르면
눈발 하느님은 국물도 없을 것이다
시멘트 범벅인 장화 하느님이
단체손님을 받을 제일 큰 방에서
신문지를 확 걷어치울 것이기 때문이다
삽자루나 질통에 이마를 부딪힌 채
선배님들의 입 속으로 후룩후룩 넘어가는
청국장을 아름다이 바라볼 것이다
그들 가운데 젊은 운동화가
컵라면 빈 그릇에 남은 반찬을 쓸어 담아
소주 됫병 옆에 밀어놓는다
저걸 한 모금 들이켰으면 좋겠다고
눈발 하느님이 몸서리를 치자
크윽, 눈길도 없니 녹아버린다
- 이정록, <청국장> -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퉁퉁 분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 이정록, <봄비 내린 뒤> -
갓개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
금강 하구 둑에 앉은 사내
아무 일도 없는 물살에
눈길을 내려놓고 있다
천천히, 제 한 몸으로 노 젓는
살얼음을 바라보고 있다
한때 자신의 대청마루였던 얼음 조각을
시린 물갈퀴로 부서뜨리는 새떼들
작은 것에 금이 가는 것이지
저 사내의 나이테를 치고 간 것도
얼음 조각처럼 하찮은 것이었다
살얼음의 잔가시에, 그의 목젖
우렁우렁하던 실핏줄은 터져버렸다
밀물처럼, 겨울 새떼와 살얼음을
상류 쪽으로 몰로 오는 목선 한 척
다시 한번 차고 오를 날 있으리
헛기침으로 갓개를 떠나는, 저 석양 한 칸
천천히, 제 한 몸으로 노 젓는 살얼음이
실핏줄을 돋우고 있다
- 이정록, <석양> -
세심사에 앉아 역재방죽을 내려다본다
누가 봐도 얇은 절. 주차장과 불상이 마당 하나로 가깝다 물풀의 발들이 다 보이는 방죽, 대밭 때문에 세심사의 온몸을 닦아주지는 못한다 얕은 물이 욕심도 많아 하늘이 깊다 방죽 가운데 작은 섬엔 봄 한철 벚꽃 흐드러지고, 나무 아래엔 충성심 깊은 개의 무덤도 있다 마음이 젖은 바가지라서 둑을 지나는 기차 소리도 깨알 같은 글씨로 받아 적는 역재방죽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나, 멸종 위기라고 알려졌던 가시연이 방죽 안에 가득하다 수초 사이사이 맑게 둠벙을 열어 소아과 주사실처럼 낚시찌도 꽂고 있다 사람의 눈길 없이 어찌 저 홀로 반짝일 수 있겠어요 엄살엄살 세심사를 올려다보는 방죽의 눈, 작은 섬에서 개 짖는 소리 건너와 댓이파리를 흔든다 읍이 커지면 방죽을 메우려 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시연을 살리자는 녹색 친구들의 플래카드가 백로 떼처럼 펄럭거린다
저 가시연이 낸 몸속에도 살고 있다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얽히고설킨 너의 수초 사이에 이 꽃짐을 부릴 것이라고 석양에다 쓴다 세심사도 가시연꽃 한 자리를 시멘트 벽면에 옮기고 있다 내 욕심의 방죽에도 너라는 가시연이 있어, 세월은 그 무엇으로도 나를 메우지 못할 것이라고 철로 위에 쓴다
편지를 닫자 봉곳봉곳 연꽃 봉우리를 밀며 기차가 간다
창마다 가시연꽃 우표를 붙이고 너 있는 서쪽으로 마지막 열차가 간다
- 이정록, <가시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