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서

by 꿈강

이문재 시인의 시평을 길라잡이 삼아 함민복 시인의 시를 감상해 보자.


급진주의자 로베르토 웅거는 말했다. "상상력은 기억을 예언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이다." 그렇다. 여기 상상력의 발휘가 있다. 상상력의 전위가 있다. 시의 궁극 목표는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거니와 더 나은 삶과 사회를 꿈꾸는 것이 시의 권리이자 책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민복의 시를 권한다. 함민복의 상상력은 우리가 기꺼이 공유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다. 함민복의 시를 마음껏 갖다 쓰자. 함민복의 시를 불씨 삼아 불타오르자. 우리, 마음껏 상상하고, 있는 힘을 다해 변화하자.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 함민복, <흔들린다> -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




십 년쯤 된 가지에 까치집을 얹고 있는

삼백 년 된 느티나무의 가지 끝은

바람에 흔들리는

한 살이고 새순이고

나이 먹지 않은 지금이다


삼백 년 된 느티나무는

밑둥치를 기단으로 삼아

줄기 쪽과 뿌리 쪽으로

삼백 개의 원에서 한 개의 원까지

나이테 탑을 쌓고 있다


위로

아래로


상승의 욕망과 하강의 욕망이 맞부딪치는 부분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힘에 끊어질 것 같고

서로 박차는 힘에 다져져 단단할 것 같기도 한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 나이는 삼백 살이고

한 살이고 새순이고

실뿌리 한 가닥 막 습기에 젖는 순간이다

- 함민복, <나이에 대하여> -




줄자는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다

자신을 확신해야 무엇을 계측할 수 있다는 듯

얇은 몸 규칙적인 무늬

줄자의 중심엔 끝이 감겨 있다

줄자는 끝을 태아처럼 품고 있다


수도자의 뇌를 스르륵 당겨본다

- 함민복, <줄자> -




죽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수은전지 갈러 가는 길

시계가 살아 움직일 때보다

시계가 무겁다

시계가 살았을 땐

시간의 손목에 매달려 다녔던 것일까

시간과 같이 시계를 들고 있었던 것일까

죽은 시계를 차고 나니

마치 시간을 들고 있는 것처럼

마치 시간을 어찌할 수 있는 것처럼


시계가 무겁다

- 함민복, <죽은 시계> -




1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2

입과 항문

구멍 뚫린

접시 두 개

먼 길

누구나

파란만장

거기

우리

수평의 깊이

- 함민복, <양팔저울> -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땐

제 몸을 넌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빨래집게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흩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 함민복, <빨래집게> -




안개는 풍경을 지우며

풍경을 그린다


안개는 건물을 지워

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다


안개는 나무를 지워

무심히 지나쳐 보지 못하던 나무를 그려보게 한다


안개는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나누어 놓는다


안개는 사방 숨은 거미줄을 색출한다

부드러운 감옥 안개에 갇히면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다


시선의 밀어냄을 흡수로 맞서며

눈동자에 겸손 축여주는 안개의 벽


안개는 물의 침묵이다

안개는 침묵의 꽃이다

- 함민복, <안개> -




태풍은 온다 먼바다 큰 바다에서

수직한 것들이 수평을 절감해보는 날

지하의 뿌리들에게

지상의 몸들을 치열하게 읽어보라고

지상의 몸들에게

지하의 뿌리들이 땅 움켜쥐는 소리 들어보라고

태양 조명 끄고 구름 스크린 휘날리며

아, 저 많은 바람은 다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태풍이여

수직한 것들의 근심을 뿜어 올려 주는

건물의 명함인 간판을 뒤흔들며 호명하는

수평도 차오르면 위험하다고 댐의 수위도 조절시키는

티브이 채널을 물과 바람의 나라 생중계로 통폐합하는

움직이는 기체의 닻으로 고체들의 욕망을 정박시키는

태풍이여

수직한 것들의 호구조사 날

사람인 나는 유리창에 테이프로 x자 붙이고

수평으로 누워

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며

또다시 불안을 쌓아 올린다

- 함민복, <태풍> -




저거 좀 봐

밝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나무를 들고 있는 것 같네


사뿐, 들고 있는 것 같어


대롱대롱 들고 있는 것 같지


그러라고 잎도 졌나봐


어!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슬금슬금 펴지네

- 함민복, <늦가을 감나무> -




텃밭에

햇살과 바람에 걸리는 그물


수직의 꽃밭에

오이꽃이 피고 지고


그물에

오이덩굴이 걸렸더니


오이덩굴에

그물이 걸렸더니


죽어서도 그물 놓지 못하는

오이덩굴에


햇살과

바람이 걸려


서그럭

서그럭

- 함민복, <서그럭서그럭> -




길을 가다가 도라지

밭에 올라가 보았지요

꽃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

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


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


도라지 대궁 도라지 잎들은 무뚝뚝한데요

하얀색 보라색 꽃들은 새색시 같았지요

백도라지도 보라색 도라지도

꽃봉오리 맺힌 것들은 다 하늘 향해 있고요

핀 꽃들은 벌들 들락거리기 좋게 목 숙이고 있데요


보라색 꽃잎에 들어갔다가

금방 흰 꽃잎에 들어가는 벌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도라지들

세상에, 벌이 꽃에 앉으면

무게중심 착 잡으며 흔들리지 않는 거 있죠

지두 절정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는지

하얗게 아리게 질린 낯빛인데요


옛날에 장독대에서 각진 꽃봉오리 터뜨리던

폭폭 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 있지요

- 함민복, <도라지 밭에서> -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 함민복, <달> -




기러기 떼가 그물처럼 퍼진다


나무 탄 줄기에 매달린 호박 같은

씨앗도 무거운


몸 한 덩이


저기 걸려 올라가고 싶다

- 함민복, <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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