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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Jun 03. 2022

제가 가끔 좀 즉흥적이라서요.



2017년 추석, 9일간의 대국민 연휴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개천절과 추석과 주말이 절묘하게 나란히 이어지고, 샌드위치로 끼어있던 날까지 임시공휴일 처리가 되면서 전 국민을 위한 깜짝 연휴가 성립되었다. 다들 어디로 여행을 갈지 들떠 있지만, 나는 연휴를 반으로 접으면 딱 정중앙에 선이 그어질 날짜에 업무 회의가 잡혀있었다.


2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처음 여행을 시작하여 늦바람이 든 나는,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콧구멍에 외국 공기를 넣어줘야만 숨을 쉴 수 있는 몹쓸 병에 걸려있었다. 게다가 1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휴가를 가고 있지 못한 상태였으니 잔뜩 침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실의에 잠겨있던 나에게 함께 일하는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시간 안에 원고를 못 넘길 것 같아요. 추석 연휴 끝나고 원고를 넘겨도 될까요..?”


물론이고 말고요! 여행을 가라는 신의 계시가 왔도다!!! 전화를 끊고 날짜를 확인했다. 연휴는 고작 3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당장에 ‘직항’으로 갈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바다나 강’에 인접한 도시를 검색하였다. 대다수의 티켓은 다 팔린 상태에서, 마지막 순간에 프라하 직항 티켓을 발견, 그대로 평소 가격의 2배 이상을 지불하고 티켓을 구매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마치 이 정도는 지불할 능력이 되는 사람인양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말이다.


게다가 출국 전날은 부모님과 사는 집의 이삿날이었기에, 마치 동네 마실을 가는 양 ‘엄마, 나 낼모레 체코 가도 돼..?’ 하는 나의 질문이 엄마에겐 몹시 황당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을 터였다. 물론, 저 질문에 따른 엄마의 기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연이어 이렇게 대답했으니까.


 "엄마, 사실 허락을 구한 건 아니야, 걍 통보야... 이미 티켓 샀어."


출국 3일 전에 평소 가격의 2배도 넘는 돈을 주고 프라하행 티켓을 산 후 작은 배낭 하나에 잠옷이랑 여벌 옷 두 벌만 넣고 떠난 여행은 내가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즉흥적인 일 중에 하나였다. 이 일은 마치 앞으로 내 인생에서 벌어질 ‘즉흥성’에 대한 복선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약 2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많이 아팠다.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팠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과 미움받을 용기가 부족하여 궂은소리를 종종 속으로만 삼키던 내 성격이 병을 키웠다. 수면 중 극심한 공황 발작이 몇 번에 걸쳐 찾아왔고, 오늘 밤에도 또 발작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예기 불안이, 깨우지 않으면 하루에 12시간도 잘 수 있는 나에게 매일 밤 수면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병원을 찾아다니며 약을 지어먹고 수면 뇌파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나에겐 희귀 질환인 기면증과 공황 장애라는 진단이 찾아왔다. 수면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에 문제가 있는 병이 기면증인데, 낮 시간엔 꾸벅꾸벅 졸게 만들고, 밤엔 깊은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병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의견은, 기면증과 극심한 스트레스가 잦은 악몽을 일으키면서 수면 중 공황발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하셨다. 사실 추측일 뿐,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었고 나는 나를 깊이 잠재워줄 알약만 손에 잔뜩 든 채 병원을 나왔다.


병원에서 나온 나는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 아니다. 나의 상사에게 전화를 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시간 되시면 계시는 곳으로 제가 가겠다고. 그것은 퇴사 결정을 건네기 위한 전화였다.


자아성취와 돈벌이를 위한 일에서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버는 돈이 병의원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에서 나는 더 이상 일을 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나는 돈도 벌어야만 하고, 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보다 앞서서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건 나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갑작스러운 나의 퇴사 요청에 3개월간의 휴직을 제안했다. 나는 일단은 보류의 시간을 갖고 병의 차도를 지켜보고자 했다.


그리고 다가온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문득 여행이 가고 싶어 항공권 사이트를 보던 나는 광고 배너 하나를 발견했다.


 "골드 코스트 직항, 취항 이벤트!"


골드 코스트가 어디에 있는 뭐지? 주로 전통과 문화가 뚜렷한 유럽 국가들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선호하는 나에게 호주는 몹시 관심 밖의 나라였다. 시드니나 멜버른처럼 대도시가 아니면 이름조차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나는 골드코스트가 호주에 있는 도시인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어디에 있는 무슨 도시인 줄은 몰라도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황금빛 해안의 도시. 겨울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에게 있어 우리나라와는 계절이 반대인 그곳의 날씨도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직접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로 결심했다. 12 25일에 떠나는, 살면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도시, 이름과 계절(+값싼 티켓) 맘에 들어 구매한 골드코스트행 티켓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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