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중순 즈음 한국으로 들어온 나. 3개월의 휴직 기간 중 이제 막 한 달을 조금 넘게 사용한 상황이었지만, 난 3개월 후 복직을 할 것이라는 회사의 기대를 저버린 채 퇴사를 선택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는 시점이었고, 4년 가까이를 다닌 회사의 시스템이 개선되어가고 주식 상장의 호재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기에 주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회사 대표님은 내게 이 시점에 회사를 관두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회사의 새로운 사업부의 초창기 멤버로서 꽤 오랜 시간 고생을 해왔기에, 많은 호재를 앞둔 상황에서 퇴사를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는 옳은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주관적’ 선택에 따라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내가 지금 나의 인생에서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로지 나만이 알 수 있는 거니까. 오히려 내가 내린 결정을 뒤집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금전적 여유가 있어서도, 내 삶을 새롭게 개척해나갈 커다란 용기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더 늦기 전에, 내가 더 아프기 전에 내 곁에 찾아온 평화와 행복의 시간을 간절히 붙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시간은 지난 8년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 온 과거의 내가, 잔뜩 지쳐있는 현재의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기에 더더욱 놓칠 수 없었다.
결국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를 선택 속에서 2월 내내 급히 인수인계를 마치고 비자를 신청한 후, 3월 중순에 맞추어 호주로 돌아갈 티켓을 구매했다. 하지만 그즈음 갑작스럽게 시작된 코로나의 습격. 2월 말 즈음, 출국이 아직 보름도 넘게 남은 상황에서 몇몇 국가들이 한국인 입국 금지령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아.. 나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평범한 월급쟁이에겐, 아니 이제 백수가 될 나에겐 1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비행 스케줄을 앞당기는 것이 꽤나 고민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예감에 결국 마지막 출근 이틀 후 바로 출국을 하는 것으로 스케줄을 변경하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은 빨리 해결해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2월 28일, 마지막 출근을 한 후 나는 하루 만에 짐 싸기에 돌입하였다.
퇴사 다음 날 급하게 하루 만에 짐을 싸고 나니 나의 짐 가방은 고작 25인치 캐리어 하나와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1년 이상의 어학연수나 유학 따위를 한다고 하면 남들은 이민 가방이나 문짝만 한 캐리어를 사곤 하는데. 난 내가 유럽 여행을 갈 때마다 들고 다니던 25인치 캐리어 하나에 필수적인 물건들만을 챙겼다. (대신 가방이 터질 것 같아서 엉덩이로 깔아뭉갤 때에만이 캐리어 지퍼를 잠글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25인치 가방 안엔 내 인생의 전부가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이 가방 하나만 갖고도 1년을 다 살아낼 수 있는데, 그간 한국에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짐과 잡동사니들을 끌어안고 살았는지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옷이 빼곡히 들어찬 옷장을 볼 때면, 작년까진 마치 벌거벗고 다녔던 것 마냥 입을 옷이 하나도 없고. 화장대나 책상 서랍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억도 안 나서 중복되는 물건들이 가득하기만 한데,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부질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지냈는지가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호주에서 1년을 살든 2년을 살든 나의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고작 25인치 캐리어 한 짐만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퇴사 한 지 이틀 만에 하나의 캐리어에 1년짜리 인생을 담아 넣고 호주에 돌아온 나, 처음 호주에 왔던 그날처럼 달큰한 꽃향기를 맡으며 앤디의 집에 도착을 했다. 커다란 해바라기 꽃이 그려진 시원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앤디가 한 달여 만에 돌아온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해주었다.
“Welcome back, Ji!!!”
인생에서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하며 살던 내가, 두어 달 전만 해도 어디에 붙어있는 어떤 도시인 줄도 모르던 골드코스트에 살기 위해서 즉흥적이고도 갑작스럽게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
한편, 내가 앤디의 환대를 받으며 호주에 도착한 이틀 후 호주 정부는 한국인 입국 금지를 내렸다. 더불어 내가 최초에 구매한 티켓의 출국일이 되기도 전에 호주 정부는 전 세계 국가를 상대로 국경을 봉쇄해버렸다. 역시 촉이 좋지 않을 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대로 일을 저질러야만 한다. 단 돈 10만 원이 아까워 비행기 스케줄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쓸 일조차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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