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로 떠난 골드코스트 여행은 어느새 해를 넘기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일주일만 머물 생각으로 첫 숙소만 예약해 두었을 뿐, 그다음 일정은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앤디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마음이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편안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와 함께 지내며 잃었던 활기를 조금씩 되찾았고, 그 덕분에 자연스레 ‘조금 더 머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앤디의 집에서 몇 주를 더 보내게 되었고, 어느새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는 민박집 반장 앤디 옆에서 부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1월 초, 앤디의 집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네덜란드에서 온 여성 여행객, 헬마였다. 활짝 웃을 때면 주름이 지는 얼굴과 달리 탄탄하고 건강해 보이는 몸에 본인의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있던 헬마. 그녀는 아이들을 시집장가를 보낸 후 늦은 나이에라도 혼자만의 여행을 해보고 싶어서 호주로 배낭여행을 떠나온 분이셨다. 60대에 홀로 떠나는 여행이라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호탕하고 유쾌한 그녀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도 같달까.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는 것도 아니고, 배경이 비슷한 것도 아닌 데에도 헬마가 친숙하게 말을 걸어오면 나와 앤디 모두 익숙한 듯 그녀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마도 낯선 여행길에서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우리 셋은 더 빠르게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며칠 후, 앤디의 생일이 다가왔다. 평소 바다를 사랑하는 그녀답게 지인의 작은 세일링 보트를 빌려 보트 위에서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다. 7-8명쯤 타면 가득 차는 소박한 배였지만, 그만큼 더 친근하고 따뜻한 파티가 될 것 같았다. 나와 헬마는 당연하다는 듯 앤디의 초대를 받아들였고, 마치 파티의 공동 호스트인 양 생일 당일 아침엔 함께 음식을 준비했다. 한식에 흠뻑 빠져 있던 앤디를 위해 김밥도 여러 줄 말았는데, 헝가리인, 네덜란드인, 한국인이 셋이서 김밥을 만들던 그 모습이 얼마나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는지 모른다.
음식이 준비되자 앤디는 생일을 위해 옵숍에서 구매한 핫핑크색 새틴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복장만큼은 할리우드 요트 선상 파티가 따로 없었는데, 앤디의 복장 못지않게 생일에 모인 지인들의 국적도 눈에 띄었다. 한국, 헝가리, 네덜란드, 태국, 콜롬비아, 호주. 지구촌 사람들이 작은 보트에 옹기종기 모여 앤디의 생일을 축하했다. 신기한 건,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편안히 어울렸다는 것이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몸짓과 표정, 웃음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어눌한 농담 하나에도 모두가 웃음보를 터뜨렸고,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보트 위는 금세 작은 축제의 장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었다. 나는 손님이었고, 앤디는 호스트였으며, 헬마는 새로운 투숙객일 뿐이었다. 그런데 함께 식탁을 나누고, 같은 보트에 올라 바람을 맞는 사이, 우리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가족처럼 변해 있었다. 누군가는 술잔을 채우고, 누군가는 음악을 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음식을 나눠주며 자연스럽게 역할을 채워갔다. 이제부터 역할 분담을 하자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저 서로의 자리를 조금씩 메우며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은 늘 한시적이다. 언젠가는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바로 그 덧없음 때문에,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친밀감은 더 깊게 남는다. 그날 작은 보트 위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웃음과 온기는 오래된 가족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생일 파티의 조합은 참으로 이상하고도 낯설었다. 서로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김밥을 말고, 생일 노래를 부르고 오래된 사이인양 어울려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어색한 조합이 의외로 잘 맞았다. 마치 양념을 잘못 넣은 요리가 우연히 맛있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참 신기한 건, 일시적 만남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헬마가 앤디의 집을 떠난 뒤로 그녀와 나는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진 못했지만, 그 이후로도 헬마는 나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맞춰 짧은 안부 메시지를 보낸다.
“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니?”
평범하지만 따뜻한 한 줄.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우리의 작은 인연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날 작은 보트 위에서 시작된 ‘즉석 가족’은 아직 해체되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