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코앞에 둔 어느 날, 앤디가 새로운 여행을 제안했다.
“우리 섬에서 새해맞이할래? South Stradbroke 섬에서 카운트다운 하자!”
대답은 당연히 “Yes!”였다. 평생 겨울이 싫어 새해 행사를 피하던 나에게 한여름의 새해맞이는 설렘 그 자체였다. 숙소는 어디로 잡을지 묻는 나에게 앤디가 말했다.
“숙소는 필요 없어. 우린 캠핑할 거거든!”
유년기 이후 캠핑을 해본 기억이 없던 나는 수영복을 챙기는 새해 여행에 들떴다. 이번 새해는 내 생애 가장 특별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우리는 마치 여성 듀오처럼 옷도 맞춰 입고, 섬으로 가는 크루즈를 타러 사우스포트의 선착장으로 향했다. 파도를 가르는 배를 타고 사진을 찍고 흥을 올리다 보니 어느새 섬에 닿았다. South Stradbroke는 캠핑객이 띄엄띄엄 있을 뿐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섬이었다. 섬에 도착한 이후 카운트다운까지 시간이 꽤 남아 우리는 먼저 야영지로 이동했다. 정박지에서 꽤 거리가 있어 고민하던 차에 자전거 렌탈샵이 보여 주저 없이 자전거를 빌렸다. 푸른 나무가 늘어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40여 분 달려 캠핑장에 도착했다.
“어머 작은 캥거루가 있어!”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던 앤디를 돕던 중 나는 작은 생물체를 발견했다. 캥거루와 똑 닮았지만 크기는 그 보다 훨씬 작은. 앤디는 그 동물은 캥거루가 아니라 ‘왈라비’라고 하였다. 작고 어린 왈라비가 도망갈까 봐 그의 곁에 살금살금 다가가 함께 사진을 찍던 나는, 자연에서 이런 귀여운 생물과 함께 캠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텐트를 치고 사진도 찍고 휴식을 취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슬슬 카운트다운 행사장으로 이동할 시간이 되었다. 가로등 하나 없이 한적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우리 이제 페스티벌 장소로 갈까?”
그 말이 고생길의 시작인 줄도 모른 채 앤디와 나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에 올라탄 후 얼마 되지 않아 첫 번째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온 아스팔트길이 막힌 것이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는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다른 방도가 없던 우리는 비포장 숲길로 향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더 큰 난관에 부딪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숲길이 온통 모래로 뒤덮여있다는 것이었다. 해변가 바로 옆에 위치해서였는지 숲길은 완전히 모래밭과 같았다. 두텁게 쌓인 모래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바퀴가 모래에 푹푹 파묻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젠장.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가 없어.”
언제나 온화함이 가득한 앤디의 얼굴에도 극심한 스트레스가 내비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는 빠르게 저물어갔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숲길에선 해 질 녘만 되어도 주변이 온통 깜깜해진다는 걸.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온 서울 촌년이 이런 걸 알 리가 있나. 불빛 없는 모래 숲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우리를 보고 캠핑객들이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정박지 근처 페스티벌 구역으로 간다는 말에 모두가 놀랐다. “이 시간에 이 모래밭길을 10킬로나?” 나중에야 알았는데, 우리가 있던 야영지는 캠핑객들이 개인 보트를 타고서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러니 자전거를 끌고 모랫길을 헤매는 우리가 무모해 보였을 수밖에.
이미 해는 수평선 너머로 넘어갔다. 나의 온몸은 소나기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체력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 밑으로 꺼졌다. 더 지옥 같은 사실은 이젠 멈출 수도 없다는 것. 여기서 멈추면 숲 길 한복판에서 조난당할 판이었다.
“앤디... 나 더는 못 가겠어.”
“지- 여기서 멈추면 그게 더 위험해. 어떻게든 가야 한다고.”
이젠 끌어 쓸 체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나에게 앤디는 힘을 내라며 어떻게든 자전거를 굴려 나갔다. 짜증은 날지언정 적어도 자전거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캡틴 헝가리 같은 앤디와는 달리 산송장 같은 꼴의 나는 멀찌감치 그녀의 뒤에서 외치고 있었다.
‘캡틴 헝가리.. 제발 나 좀 살려줘...’
죽어나는 시간을 버텨 드디어 페스티벌 지역에 도착했다. 내 생애 최악의 체력 훈련이 2시간 만에 끝난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다시 캠핑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마음 같아선 텐트고 짐이고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는 표현이 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을까. 땀에 절어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 나는 페스티벌 장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앤디에게 물었다.
“앤디... 그런데 우리 이따가 어떻게 돌아가..?”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앤디의 얼굴에 잔뜩 구름이 꼈다.
“지, 당장 일어나서 일단 기도하자.”
이제 우리가 믿을 곳은 기복신앙 밖에 없었다. 땀 냄새에 모여든 모기들에게 온몸을 뜯기고 있던 내 옆에서 앤디는 달을 향해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유니버스- 우리를 제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보트를 가진 누군가를 우리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우리가 되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제발,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이든 누가 되었든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연말 연초, 우리의 첫 번째 신년 기도가 그 순간 전 세계 각국의 신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 시각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를 한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기도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 곁으로 어느 두 남자가 다가왔다. 두 남자 중 하나는 머리에 ‘선장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혹시, 카운트다운 행사장 입구가 여기인가요?”
뒤늦게 행사장으로 들어서려는 두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앤디는 그들에게 친절히 행사장 입구를 알려주며 가볍게 스몰 토크를 하기 시작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 앤디는 통성명을 했다. ‘내 이름은 앤디예요-’라고. 그때 선장 모자의 그 남자가 대답했다.
“엇, 내 이름도 앤디예요! 난 앤드루라서 앤디라고요!”
이름이 같은 그 남자를 보며 앤디는 확신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유니버스에 존재하는 신들 중 하나가 보낸 구원자일 것이라고! 구원자로 확실시되는 그의 등장에 앤디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장 모자’는 왜 쓰고 계시냐고, 혹시 보트를 타고 오셨느냐고. 앤디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그의 친구와 함께 개인 보트를 타고 섬에 왔다고 했고, 그 순간 앤디는 외쳤다.
“땡 갓...!” (땡잡았다...!!)
앤디는 이어서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한 뒤, 행사 끝나고 야영지까지 태워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부탁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 보트로 데려다 드릴게요.”
그렇게 거짓말처럼 나타난 구원자의 약속에 우린 해방을 맞은 듯 뛸 듯이 기뻐했다. 그때부턴 새해 카운트다운 행사를 맘 편히 즐길 수 있었다. 해변가를 밝히는 현란한 조명과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신나는 음악. 맨발로 바다와 해변을 누비는 사람들. 그 속에서 땀에 절어있었던 나와 앤디도 몇 시간 전의 비극은 잊은 채 새해를 위한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신나는 새해맞이가 지난 후, 선장 모자를 쓴 캡틴 앤디는 약속대로 우리를 야영지로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신년의 첫 번째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신년맞이 여행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비록 모래밭 길에서 자전거를 끌다 이리저리 부딪쳐 다리는 온통 멍투성이가 되고, 밤새도록 모기들에게 뜯긴 탓에 온몸이 총을 맞을 듯 벌건 자국으로 가득했지만 말이다. 여행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선 며칠간 아무 데에도 나가지 못하고 침대 맡에 쪼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여행의 후유증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진심으로 기도하면, 우주는 정말로 대답해 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