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바다 중에 무엇이 더 좋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무조건 바다를 선택한다. 탁 트인 시원함에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무념무상해지곤 한다. 바다는 있는 그 자체로도 좋지만, 바다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쩌면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여름이면 아빠의 작은 프라이드 자동차를 타고 사촌들과 함께 바닷가로 향하곤 했다. 튜브를 끼고 바닷물에 둥실둥실 떠있는 것도 좋았지만, 사실 바다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가족들과 캠핑을 하던 시간이었다. 모래 묻은 몸을 씻겨주고 새 옷을 입혀주던 엄마의 따뜻한 손길, 해수욕을 마친 뒤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라면, 어둔 밤을 밝혀주는 작은 랜턴과 작은 텐트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청하던 여름밤의 기억. 아마도 바다는 그것이 전해주는 기억까지 더해져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바다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유아기 시절에 바다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바다에 대한 ‘첫인상’이 나에게 남아있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참 궁금하다. 성인이 되고, 세상을 겪은 후 눈과 귀가 트인 상태에서 마주하는 바다는 어떤 느낌을 줄까.
헝가리는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보니 앤디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가 처음 바다를 본 건 20살이 되던 해, 스페인의 Tossa de mar에서였다. 그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이러했다.
“그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했어. 그날 보름달이 떴는데, 바다 위에 뜬 보름달은 내 생애 처음 보았어.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넋이 나갔고, 그 순간에 완전히 사로잡혔어. 난 아직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해.”
나에겐 그저 익숙한 바다가, 그녀에겐 인생을 뒤흔들 만큼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 바다와 사랑에 빠졌다. 마치 애초에 자신의 삶이 바다에서 시작된 것처럼. 결국 앤디는 바다를 찾아 스페인의 지브롤터로 향했고, 내륙 지방에서 지냈던 20여 년의 설움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아예 바닷 마을에 터를 잡았다. 마침 앤디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세일링 보트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그와 함께 대다수의 시간을 보트에서 보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바다 위 보트에서 지내며 앤디는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앤디에게 바다는 마치 광활한 육지인 것만 같았다. 보트를 타고 바다 위에 펼쳐진 넓은 세상을 누비는 것이 그녀에겐 행복이었고, 언젠간 꼭 나만의 보트를 갖고 말겠다는 꿈도 키웠다. 스페인에서의 6년은 오로지 ‘바다’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한동안 헝가리에서 지내던 앤디는 다시 바다가 그리웠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보다는 바다에서 멀어진 것이 그녀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어느 날, 앤디는 헝가리의 선물 가게에서 호주에 산다는 매리라는 여인을 만났다. 매리와의 대화 속에서 앤디는 홀리듯이 호주의 부름을 느낄 수 있었다. 앤디는 호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리는 자신을 찾아오라며 앤디를 호주로 초대했고, 앤디는 스치는 인연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여행 가방에 필수 물건들을 챙겨 바로 호주로 향했다. 그것이 앤디가 호주라는 나라와 첫 인연을 맺은 순간이었다.
그 운명 같은 부름을 따라 다시 바다의 세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세일링 보트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바다 곁에서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사실 그녀가 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바다에 가서 바다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순간이다.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 코끝으로 전해져 오는 짭짤한 바다의 내음. 쾌청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태양빛을 따라 부서지는 윤슬까지. 바다가 빚어내는 모든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다.
나와 함께 지내던 시절, 앤디는 늘 하루에 한두 번씩 해변을 걷고 일광욕을 즐겼다. 바다가 너무 좋아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바다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앤디와 바다는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를 끌어당겼고, 삶이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바다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품어주었다. 어제도 오늘같이, 오늘도 내일같이. 바다는 절대로 그녀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앤디와 함께 바다에 갈 때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했던 이유는 아마 바다와 그녀의 사랑이 만들어낸 평온 덕분이었으리라. 그때의 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소가 파도처럼 살포시 밀려온다. 어느 육지에서 온 여인은 이렇게 나에게 또 한 번,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바다의 기억을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