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이 있다. 자라를 보고 고작 놀라기만 했으니 솥뚜껑을 보고 놀라는 데에 그치는 것이지, 자라한테 물리기라도 했어 봐라. 솥뚜껑을 보는 순간 발로 뻥- 차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상처를 입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사랑은 ‘최종의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실패로 치부되고, 그 실패는 아픔의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니까. 그런데도, 자라한테 제대로 물어뜯긴 경험이 있어도 또다시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다. 용감한 사랑꾼들. 바로 내 친구 앤디가 그렇다.
앤디가 브런스윅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혼자 떠난 여행이라, 출발할 때부터 그녀는 오히려 더 들뜬 모습이었다. 브런스윅의 분위기는 관광지인 서퍼스 파라다이스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대신 여유와 느긋함이, 그리고 낯선 이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녀가 말하길, 브런스윅은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 같다고 했다.
더군다나 브런스윅에는 앤디가 늘 동경하던 캠핑밴 무리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 있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캠핑밴 사이에서 명상과 요가를 하는 사람들. 앤디가 마음에 그리던 이상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곳을 찾은 앤디, 마치 고향에 온 듯 익숙한 풍경 속에서 그녀의 레이더에 걸려든 남자가 있었다. 캠핑밴에서 생활하며 히피 바이브를 풍기는 남자, 크리스. 그가 앤디의 취향을 정통으로 저격했다.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앤디가 머리 긴 남자에게 유난히 마음이 약하다는 걸.
한 번은 어떤 남자가 앤디에게 관심을 보일 때, 내가 그 남자의 장단점을 앤디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백했다.
“그 사람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근데... 머리가 너무 짧아. 그게 좀 걸려.”
나는 참다못해 물었다.
“아니, 그냥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네 스타일대로 머리를 기르게 하면 안 돼?”
그녀는 배꼽 잡고 웃으며 “그거 좋은 생각이네!” 하고 말했지만, 정작 그 뒤로도 여전히 ‘이미 머리가 긴 상태의 남자’를 선호했다.
이번에 만난 크리스라는 남자는 그녀의 바람대로 ‘이미’ 머리가 길고, 캠핑밴에 살고 있었으며 역시나 히피 감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또 하나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을 아예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중독을 거부하고, 오롯이 자연과 자기 삶에 집중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앤디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렸다.
“아니, 굳이 왜 이 윤택한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며 사는 거야?”
앤디는 크리스와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공중전화로 연락할 때를 제외하곤 도통 그와 연락할 방법이 없어 힘들어했다. 그런 앤디를 볼 때마다 나 역시도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앤디, 내가 너한테 비둘기라도 한 마리 사줬어야 했나 봐. 그렇다면 그 새가 너에게 크리스의 소식이라도 물어다 줬을 텐데 말이야.”
내가 진작에 앤디에게 비둘기를 사주지 않은 죄로, 이후 앤디는 그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100킬로를 달려 그의 캠핑밴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던 것은 크리스를 만나기 위해 브런스윅으로 향하는 날이면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생기가 돌았다는 것이다.
“지, 나 오늘 또 브런스윅에 가!”라며 앤디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순간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그와 함께 바다를 즐기기 위해 맞춤 수영복까지 특별 제작하던 모습. 타로 카드를 들고 사랑의 운세를 점치던 날들. 그녀는 그때 참 많이 달라 보였다. 평이한 일상 속에 늘어져 있는 대신, 사랑에 취해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마치 오래 꺼져 있던 엔진에 다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지나간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파했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앤디의 이런 긍정적인 변화를 보는 것은 정말로 기뻤다. 물론 문명을 거부하는 그 때문에 앤디가 답답해할 때가 많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그의 고집스러운 행동들이 앤디로 하여금 그에게 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는 그의 모습이, 그녀에겐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나 보다. 앤디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랑을 하는 방식이었다.
사랑은 지긋지긋하고, 연애나 결혼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세대.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의 낭만을 믿고 기꺼이 빠져드는 앤디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상처받고 피를 흘릴지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사랑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사랑에는 오직 사랑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싱그럽고 생동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고, 다시 꿈꾸게 하고, 무엇보다 다시 ‘나’를 움직이게 한다. 사랑에 빠진 앤디는 그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