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함께 일하는 어르신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들면 연애 세포가 죽고, 새로운 사랑에 대한 열정이 식는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여전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지만, 다만 살아온 세월만큼 이별의 고통을 잘 알기에 그것을 또 겪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고. 어릴 때는 몰랐기에 이겨낼 수 있었지만, 그 고통의 크기를 경험한 이후에는 그것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라도 사랑에 주저하게 된다고 했다. 그분에 비하면 나는 아직 한참 어리긴 하지만 그 말에는 공감이 갔다. 사랑이 주는 설렘보다 이별의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올 때, 사람들은 사랑의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해 버린다. 그만큼 이별의 후폭풍은 크고 엄청나다.
이별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람과의 이별, 물건과의 이별, 관계를 쌓아온 그 무엇과의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과의 이별일 테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 다음으로 고통스러운 것이 사랑과의 이별일 것이다. 가장 가까웠던 존재와의 영원한 단절. 그것이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각자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결심과 실행에 이르는 모든 단계가 더없이 괴롭다. 그래서 연인과의 이별은 정말이지, 싫다.
나는 헤어진 사람과의 기억과 추억을 모조리 삭제해 버리는 편이다. 인연이 끝난 누군가가 마치 내 인생에서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공장 초기화’를 해버린다. 핸드폰 사진첩은 물론이고 백업용 클라우드까지 뒤져서 사진 한 장 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지나간 연인은 내 머릿속에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왜 그렇게 쥐 잡듯이 모든 걸 지워버렸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사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지나간 연인이 너무 나빴기 때문도 아니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이별의 시간이 너무나 괴로워서, 비워냄으로써 그 시간을 견디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앤디의 집에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그물망 장식이 있다. 그물망에는 전 세계 도시의 엽서들이 걸려 있고, 불가사리나 조개껍질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어느 날, 나는 무심코 그 엽서 중 하나의 뒷면을 보았다. 엽서의 뒷장에는 누군가가 앤디에게 쓴 짧은 사랑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많은 엽서들은 20대 시절 앤디의 남자친구가 세계 곳곳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마다 그녀에게 보내준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물망에 걸려 있는 건 단순한 엽서가 아니라, 지나간 사랑의 조각들이었다.
“앤디, 이거 다 전 남자친구가 보낸 거야? 그런데 아직도 가지고 있어?”
“좋은 추억이니까 간직하고 있었지!”
앤디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뜻밖이었던 건, 그 남자가 20대 시절 앤디의 마음을 가장 많이 아프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앤디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던 연인이었다.
“난 그런 남자가 남긴 거라면 진즉에 다 태워서 없애버렸을 거야.”
내 말에 앤디는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커져서 이별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를, 그녀는 여전히 따뜻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르겠지만, 나는 전 남자친구에게 받은 물건을 굳이 버리지 않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던 시간, 나를 생각하며 무언가를 선물했던 순간은 아름다운 거잖아. 나는 사랑에서 비롯된 그 시간들을 소중히 다루고 싶어. 아름다운 순간이 담긴 물건에게 벌을 줄 필요는 없잖아.”
앤디가 맞고 내가 틀리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녀의 말이 명료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순간의 고통이 괴로워 모든 흔적을 지운 채 도망쳐 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녀는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모든 기억들이 삶의 결로 자리 잡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결국 그녀는 지나간 인연과의 이별도 ‘추억’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주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도 아직 가지고 있어.”
앤디의 말을 듣자, 예전에 남자친구와 맞췄던 커플링을 헤어지기가 무섭게 금은방에 팔았던 내 과거가 떠올랐다. 그때 그 금반지를 팔지 않았더라면, 금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지금쯤 꽤 괜찮은 금테크가 되었을 텐데. 앤디처럼 사랑의 상처를 아름답게 간직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 이별을 간직하는 또 다른 팁을 알려주어야겠다.
그 다이아 반지, 잘 뒀다가 급전이 필요할 때 비상금으로 쓰라고. 그게 이별을 간직하는 또 다른 가치가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