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12개를 먹으며 맞이한 새해
5, 4, 3, 2, 1, Happy...new year...!!
새해를 맞이하는 첫 순간, 나와 친구들은 입안에 가득 든 포도알을 씹어내리며 겨우 입을 떼었다.
그날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새해전야에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는데 친구 A가 가방에서 청포도 두팩을 꺼내며 내년 소원을 빌어보자고 했다. 스페인이나 스페인어권 나라에서는 새해에 포도 12개를 먹으며 포도 한알에 소망 하나를 생각한다고. 독일인인 그녀는 학사시절에 남미의 한 국가로 교환학생을 다녀왔고, 그 문화와 언어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포도를 1초에 하나씩 집어먹어야 한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한동안 열띤 논쟁을 했다.
1초에 하나씩 먹다가 목에 걸리면 어떡해? 무서워! 나는 약간 겁에 질려 외쳤다. 소망을 12개씩이나 생각해야한다구? 난 3개도 어려운데. 누군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키미는 그냥 장난을 쳤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해야해? 그냥 난 짧게 할래. 건강! 돈! 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준은 아무말 없이 혼자 핸드폰으로 소망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키미는 우리 그룹중에서 제일 이 계획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친구였다. 우리가 바쁜 계획을 세우며 핸드폰으로 소망리스트를 적는 동안 그는 내가 만들어놓은 치즈 토마토 샐러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망을 미리 써놔도 되는지, 아니면 그때 바로 떠올려야 유효한것인지, 1초에 1개는 너무 어려우니까 10초에 하나 먹는건 어떤지, 건배는 언제하고 포옹은 언제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타협 끝에 1분동안 12개를 먹기로 했고, 12시 땡 하면 건배를 하고 옆사람과 포옹도 하고 그리고 재빨리 포도도 먹어야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우리는 각자의 포도그릇과 샴페인을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면서 카운트다운을 하는데 20초를 남기고 갑자기 한 친구가 포도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걸 본 나는 뭐하는거야, 지금 말고 열두시 떙 하면 먹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아냐 12시 전부터 먹는거야" 키미가 말하며 포도에 다시 손을 뻗었다. 뭐? 안돼! 그걸 본 독일인 친구도 포도를 한손에 가득 담아 미친듯이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본 나와 다른 친구들도 따라서 포도를 입안에 쑤셔넣었다.
몇초동안의 정적이 흘렀고, 나는 간신히 5초를 세며 새해의 시작을 알렸다.
다같이 건배를 하고 눈을 마주치고(누군가 "나 더먹어야해!" 하고 외쳤다), 시선을 돌려보니 황당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한개씩 집어먹느라고 5개만 먹었는데, 그릇을 보니 빈 그릇이었다.
내 포도 어디갔어?! 24개 담았는데!
자리가 부족해 24개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키미가 정신없이 집어먹느라 내 몫까지 19개를 먹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어이가 없고 웃겨서 아직도 입안에 있는 포도알때문에 크게 웃지도 못하고 입을 가린 채로 낄낄거렸다.
나중에 영상을 보니, 우리가 갑자기 미친듯이 포도를 집어먹으며 침묵이 흐르는 모습이 정말 웃겼다.(키미가 포도를 향해 손을 뻗을 떄마다 화면을 가렸다. )
여기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돈에 관심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돈에 미친사람이다.
포도에 관심없는사람이 제일 욕심이 많다.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포도에 집착하며 웃었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키미가 내 몫까지 먹어버린 탓에 내 소망 7개는 사라져버렸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만 뱃속에 남았으니 괜찮다. 무엇보다 새해를 이렇게 친구들과 웃으면서 맞이한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년에도 다른 특이한 새해맞이 풍습을 시도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 참고로,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12시 종이 땡 하고 울면 그때부터 먹는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