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가기 시작했나
두 계절 사이에서
그렇게 아픈 이별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주말이면 비워지는 기숙사 복도는 늘 고독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4학년이 되니, 곧 더 거친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어깨 위에 돌처럼 얹혔다.
주말마다 남포동 거리를 걸어도 민정이 생각은 쉬지 않고 밀려왔고,
술 마시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견뎌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술이 들어가면 내 두 발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이러면 안 된다”라고 백 번 외치면서도 그 시절 나는 어딘가 조금 미쳐 있었던 것 같다.
내 방문이 잦아지자 민정이 어머니는 나를 달래며 따뜻히 맞았지만, 아버지는 “남자가 그리 약해서 어디에 쓰나!”라며 큰소리로 나를 내쫓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동생은 울면서 나를 현관 밖까지 배웅했고, 나는 때때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
이 집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해선 안 된다.”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내 다짐은 번번이 무너졌다.
후회는 다음 날마다 몰려왔다.
그럴 때마다 민정의 어머니와 동생 영애는 학교로 찾아와 나를 위로했다.
“공부 열심히 잘해라, 밥도 잘 먹고 건강해라.”
그 말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던지.
어머니는 종종 동생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라 심부름을 시키신 것 같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그건 어머니의 부탁만이 아니라 영애의 마음이었다는 걸.
우리는 남포동 근처에서 자주 마주쳤다.
영애는 그 시절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동네 형들에게 맞던 그녀의 남동생을 내가 데리고 나와 달래주던 일. 여름이면 옥상에서 고기 구워 먹던 밤공기. 무거운 짐을 옮길 때 고생하던 일들. 술에 취해 유리창을 깨고 아버지께 혼나던 일까지. 그 집과의 추억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영애의 직장이 남포동 근처라 우리는 더 자주 만났고, 만나다 보면 서로의 슬픔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덜어주는 묘한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앞으로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나는 영애에게 말했다.
“영애야, 이제 내 걱정 안 해도 돼.
어머니만 잘 챙겨드려.
난 괜찮으니까… 이젠 찾아오지 마라.
조금씩 잊고 살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말은 우리 둘에게 언제나 서운함을 남겼다.
잊어보려고 하면 또 어느 날 영애는 먹을 것을 들고 학교에 나타났다.
그게 어머니의 부탁이 아니라 영애 자신의 마음이라는 걸 나는 서서히 알아갔다.
그래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또 만났다.
언니와 함께 숨 쉬던 그 자리 라일락 향기 가득하던 골목. “언니는 라일락 좋아했는데 나는 개나리가 좋다고 했었지.”
우리는 그때와 똑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언니의 봄
처음 그 집을 찾았던 날,
민정은 햇빛이 들어와 방 안에 고요히 퍼지는 것처럼 잔잔히 웃었다.
말수가 적어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따뜻함이 있었다.
식탁을 차릴 때면 내 그릇까지 자연스레 챙겨주던 손길, 늦게 도착한 나를 향해 문틈으로 “춥지 않았나?”라고 건네던 목소리.
사랑은 이렇게 사소한 배려에서 시작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겨울 바람 속에서도 작게 피어나던 그녀의 미소—
나는 그 봄을 사랑했다.
동생의 여름
언니가 떠난 뒤, 뜻밖의 감정이 찾아왔다.
집을 드나들며 마주치게 된 영애는 언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활달하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여름 같은 아이.
언니의 조용한 온기와는 다른 뜨겁고 솔직한 에너지가 있었다.
어느 날 영애는 조심스레 말했다.
“오빠는… 언니한테 하던 말들, 가끔 나한테도 해줬잖아.
그거… 나만 착각한 거야?”
그날 이후 내 마음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내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하나였다.
언니였다.
언니의 깊은 눈빛, 섬세한 숨결. 그 모든 것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영애는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 이제 잊어버려. 오빠까지 힘들면 안 되잖아.”
그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계절 사이에서
어느 날,
영애는 편지 한 장을 남겼다.
“오빠가 언니를 좋아했던 건 알아.
그래서… 나 조금 멀리서 보기로 했어.”
그 편지는 영애답지 않게 조용했고, 슬펐고, 성숙했다.
나는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나는 두 계절 사이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붙들지 못한 채 청춘을 흘려보냈다는 사실을.
언니는 병을 숨기며 나를 아꼈고, 동생은 첫사랑 같은 마음을 품었다가 스스로 꺼내놓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미안함과 따뜻함과 아픔을 함께 안고 흐르는 강물처럼 살았다.
사랑은 반드시 완성되어야만 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다.
때로는 한 사람을 향한 따뜻함과 다른 한 사람을 향한 미안함이 엇갈려 흐르는 시간도 있다는 것을.
그 자매는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히 다가와 가장 오래 머문 사람들이다.
그들의 계절은 지나갔지만 그 봄과 여름은 지금도 내 마음 한쪽에서 아주 천천히…빛을 바꾸며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