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무의식 그림자 셀프
정신분석이라던가 심리학을 처음 접할 때는 다들 이게 뭐지 싶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싶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단어 자체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추상적이고 모호한 영역이니 만큼 벽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융을 이해하려면 ㅠㅠㅠ감내해야 되는 영역이다
융이 생각하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층계는 다음과 같다.
페르소나-자아-셀프-그림자-아니마-아니무스
그리고 각각의 층계 내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나누고 있다.
융은 의식을 자각하고 경험하는 부분을 의식의 자아라고 했다. 자아라는 것은 환경에 맞게 변화한다. 학교라면 학교에 맞는 사고를 공직이라면 공직에 맞는 사고를 작가라면 작가에 맞는 사고를 이렇게 나의 자아는 외부 사건에 변하게 된다
그다음은
융의 원형 중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있다
어원 자체는 그리스 가면극에서 주로 사용하는 가면이고
현실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누구의 페르소나라고 하면 대표작 대표 배우 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페르소나는 그렇게 변하게 된 자아의 리액션으로 표현되는 나의 모습이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자아는 그에 맞는 가면인 페르소나를 착용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상황에 따라 우리가 되고 싶은 이미지일 수도 있고 또는 우리가 현재 가지지 못했지만 보여주고 싶은 현실과 이상에서 오는 괴리 거기서 수반되는 허세일 수도 있겠다
그다음 융의 무의식 속 중요한 개념
그것은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우리가 억압했던 것들 그것은 단순히 악하거나 도덕적 금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림자의 영역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부분 일수도 있다
정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은 오이를 극도로 싫어하는 경우 그것은 그림자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오이 먹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람 사이에 관계에서 그러한 그림자를 이해하고 서로의 그림자를 존중하고 또 서로 만져주고 지켜줘야 한다
그림자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 자세히 적도록 하겠다
셀프는 의식과 무의식이 결합되어 나의 정신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셀프 상태로 나아감에 있어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 이해함이 필요하다
나의 의식 속 환경이나 시스템에 의해 변해가는 나와 무의식 속 욕망과 이상이 일치되는 순간을 융은 자기실현이라고 했다
의식의 자아 무의식 속 그림자와 원형은 가변적이기에 그것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이고 여행이다
고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엄청 즐거운 일이다
아니마-아니무스 같은 경우는
남자의 경우는 남성 안의 여성성
여자의 경우는 여성 안의 남성성
그러한 양면적인 자아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의식 무의식의 영역 모든 부분이 우리에게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표현해내는 영역. 외부로 경험으로 변해가는 나. 그리고 무의식 속 자리 잡은 진짜 나. 나의 마음속 억압되어있는 나. 나의 이면적 모습 속의 나. 이런 나라는 영역의 모든 부분이 균형이 잡혀있을 때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건강해진다.
특히나 융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나의 중심인 셀프를 찾아가는 것.
셀프를 중심으로 나를 재구성하는 것
나를 사회라는 환경에 맞춰가는 것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을 쓰고,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아닌 진짜 자기를 발견하고 찾는 것. 이것이 개성 화이다.
개성화라는 개념을 알게 되면 그것은 완성의 개념이 아닌 과정의 개념임을 알게 된다.
어제의 개성화라 생각했던 영역은 잠시 정류장일 뿐이고, 다음날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는 또다시 무의식 속으로 나를 찾는 여행을 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무한하게 되고 잠재력이 무엇보다 강해진다. 누구와도 차별화되고 개성화된 내가 된다.
우리가 셀프를 만들어 가는 길
무의식과 의식의 균형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는 아마 그림자일 것이다.
그림자는 자신이 특히나 감추고 싶어 하는 영역.
두렵고 무서워하는 부분들이 있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할 아주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특히나 굉장히 약한 부분이라 다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림자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버린다.
누구에게나 용의 역린처럼 건드리면 소스라치게 반응하는 영역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두렵고 무섭고 부정하고 싶은 나의 모습을
억누르고 무시해버리면 그것이 다른 쪽으로 팽창해버린다.
그것을 융은 자아의 팽창이라고 했다.
그렇게 억눌린 자아는 비이상적인 행동으로 혹은 히스테리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오게 되고 그림자는 자아 전체를 지배하여 그 어떤 사고도 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오로지 하나의 그림자가 자아 전체를 지배하면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자아가 팽창해버리면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모습. 그런 것들이 더 심하게 강조되어서 나타난다.
그렇기에 그러한 그림자를 풀어주고 쉬게 해 주고
또한 그림자가 내 안에서 함께 살게 하는 것 그림자와 대화하는 것이 그림자를 다스리는 길이다.
결국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러한 숨기고 싶은 나도. 나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그림자를 직면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혹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영역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곤혹이다.
그렇지만 융은 그러한 그림자를 트라우마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도 그림자를 끄집어내다가 되려 그림자가 나의 모든 자아를 지배해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정말 끔찍했고 1초도 못 견딜만한 사건 경험이 발생하게 되면, 예를 들면 친구랑 싸웠던 경험. 혹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했던 기억.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했지만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던 기억.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러한 생각 하고 싶지 않은 기억..
그러한 그림자가 나의 자아로 타고 들어와 나의 자아를 지배해버리면
나의 다른 모든 자아가 정지해버리고 오로지 나의 그 신경 쓰이는 고통, 그 신경 쓰이는 트라우마가 나의 온몸을 장악해버리는 것이다.
아니 세종아 그러면 그림자를 버리라는 거야 아니면 그림자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라는 거야
뭘 해도 힘들잖아... 무슨 선택이든 고통스러운 거 아냐?!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 속을 탐사하기 전 여러 가지 마음가짐이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음 그래서 수많은 무의식 잠재의식의 다이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많은 그림이나 이미지에서 잠재의식은 물로 표현된다.
너무나도 유명한 도덕책에도 나오는 그 그림
깊은 수면에 가라앉아서 잘 표현되지 않지만 거대하게 자리 잡은 우리의 무의식
그래서 수많은 매체에서 잠재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다이브 한다고 표현한다.
공각기동대에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갈 때 다이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내면을 보고 싶을 때 쿠사나기 소령은 잠수를 한다.
또 상대방의 잠재의식으로 접속하거나 해킹할 때도 다이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가 에바와 접속할 때 자신의 무의식과 에바의 무의식을 연결할 때도 액체를 통해 연결된다. 주인공 신지는 액체에 완전히 다이브 할 때 자신의 무의식에 접속해 그러한 무의식이 에반게리온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인셉션에서 꿈의 세계 무의식 세계로 넘어갈 때
혹은 무의식 세계를 깨우고 다시 의식의 세계로 넘어갈 때 사용하는 이미지가 바로 물이고
그 표현 또한 다이브(잠수)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에 다이브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의식과 심해의 공통점은 깊은 이미지. 모른다는 이미지. 온전히 집중해야 된다는 이미지 등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건 아무래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접속한다는 점이다.
모르는 영역 자체가 인간에게는 공포다.
공포와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해버린다면 우리는 아까 언급한 자아 팽창으로 다른 어떤 사고도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
이렇게 깊은 심해 무의식에 빠질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특정 무의식이 자아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그 어떤 상징이 필요하다
인셉션에서는 토템으로 비유되어 나온다.
본인이 의식의 자아인지 무의식(꿈)의 자아인지 구분해줄 수 있는 것
주인공 코브는 이 토템을 돌려서 팽이가 멈추면 현실이고 계속해서 돌면 꿈임을 인식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본인이 지금 자아상태가 무의식에 잠식되어 있는지
아니면 의식상태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떠한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음 이런 테마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르스-테세우스-아리아드네로 이어지는 크레타섬 이야기가 떠오른다.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을 잡기 위해 테세우스가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노타우르스를 잡고 나서
복잡한 미궁을 빠져나오려면 아리아드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 한 타래를 주고 그것을 자신이 쥐고 있고 테세우스도 쥐고 있어서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실로 연결된 길을 따라 나오면 된다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도 그러한 토템이 있다
자신이 어딘지 모르는 길을 거닐 때 자신이 먹던 과자 부스러기를 흘려 자신의 자아를 잃지 않으려 했다는 모티브
우리나라도 비슷하게 해님달님 전래동화에서 호랑이에게 쫓겨 마지막 진정한 자아인 해와 달이 되기 위해
동아줄을 잡고 승천했다는 이야기. 여기서 동아줄을 위의 아리아드네의 실, 헨젤과 그래텔의 과자 부스러기와 모티브를 함께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서도 여동생은 그 끔찍함 동서독의 냉전 속 아동 정신 실험에서 너는 보석이야 괴물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서 다시 원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오빠 요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해 무의식 중 트라우마가 자신을 지배하여 자아 팽창을 일으키고 살인귀 괴물이 되어버렸다
여기서는 너희들은 보석이라는 말은
무의식을 탐사하더라도 자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도구로 볼 수 있다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도 자신의 그림자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두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그때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은
박쥐가 널 공격했던 건 널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오히려 맹수일수록 더욱더 두려움에 떨고 있고 어릴 적 네가 느꼈던 공포 그것을 맹수 또한 알고 있는 거라고
공포가 자아를 지배하면 공격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주었기에
배트맨은 그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자신이 두려움에 떨게 되어도 빌런인 상대들 또한 두려움에 떨기에 자신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기에 멘털 싸움에서 빌런에게 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아버지의 말은 자기 자신을 되찾아주는 토템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나 자신을 잃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내가 믿는 하나님. 누군가에게는 다른 종교일 수도 있고, 그건 부모님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이 에게는 사랑하는 사람, 함께 하는 친구, 또는 나의 신념, 나의 열정. 여러 가지로 대표될 수 있다.
음
나 같은 경우 내가 믿는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길 그것이 나를 털어놓고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을 돌이키고 나의 무의식을 되돌아보곤 한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께 혹은 친구에게 그러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털어놓는다
어떤 경우는 어떠한 신념이나 열정 의지 앞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신념 열정이 나의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을 직면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무의식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
를 갖게 되고
그러한 그림자를 우리의 자아로 건강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림자를 혼돈과 장해물이 아닌 자신의 창조적이고 개성 있는 에너지로 발달시키는 것
그것이 융이 바라던 그림자와의 만남일것이다
의식의 자아와 무의식 그림자를 마주하고 일체화시킬 때 그것을 융은 셀프라고 하였다
진짜의 나를 만나는 길
내가 진짜 원하는 삶 결혼 사랑 업무 관계 등을 깨닫는 길
그것이 융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추구할 목적이라고 하였다
융의 저서를 보면 자신의 요소 파츠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이 연결돼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생각하기에 융에게 개성화는 그 사람을 결정짓는 아주 독특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를 발견하는 여행으로 생각했다
그 여행은 경험의 방법 순서 인과에 따라 같은 경험이어도 완전 다른 나를 만들어 준다
성경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흐름이 있다
이사여서, 하박국서, 계시록에서
천국을 표현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는데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난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여러 가지 의미겠지만 그 어떤 세계의 진실로 볼 수 있고
그것을 또 우리 내면의 무의식 속 신의 섭리로 이해한다면 우리 무의식 속 진실을 아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러한 나 자신을 잃지 않게 해 줄 도구를 여러 가지 만들어 두고, 또 그러한 수많은 나의 연결고리를 통해 무의식 세계 속에서도 나를 그림자에 지배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내가 누구인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식하고 자아가 형성되었을 때
안전하게 그림자를 바라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림자를 극복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회나 환경에 억압되어서 시스템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기계와 시스템이 정해준 세계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의 정해진 삶.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버린 삶이 아니다.
부모가 정해준 삶도 아니고 사회와 친구들과 동료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프레임이 정해준 삶이 아니다.
어쩌면 나도 글 쓰는 행위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 지를 탐색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나의 삶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고민해볼 수 있다면
어린 왕자의 여우 이야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의미가 되어줄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내일은 융의 대중 무의식, 상징에 대해서 적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