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람 Oct 28. 2022

사람들의 말

특히, 아이가 순하다는 말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몰랐다. 사람들이 아이에게 관심이 참 많다는 걸.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말을 붙여왔는데 돌이 되기 전까지는 대개 이런 말들을 들었다. “아이가 귀엽네.”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몇 개월이에요?“ 그리고, ”아이고,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아이가 큰 뒤로 이런 유의 충고는 듣고 있지 않지만 그때엔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날이 더운 듯해 아이의 옷을 가볍게 입히고 나가면 벌써부터 아이의 맨다리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양말은 꼭 신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날이 추운 듯해 옷을 따뜻하게 입히고 나가면 그렇게까지 입힐 필요가 없단 말을 들었다. 어떤 할머니는 아이가 물고 있던 쪽쪽이를 확 잡아당겨 빼버렸는데 이런 것은 아이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처음에는 이런 일들이 당황스러웠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고 사라지는 상황에 당혹감을 느꼈고, 나 또한 생각해서 한 행동인데 가차 없이 틀렸다고 말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대개 이런 말들은 아주머니, 할머니가 하였으므로 실은 그들의 말을 집중해 들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경험이 없고 그들은 있었다. 그런데도 되도록이면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고, 때로는 불심검문을 받는 듯해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상대가 칭찬이라고 한 말에 기분이 나빴던 적도 있었다. 아이가 너무 순해 보인다는 말이 그랬다. 아이는 눈코입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고 얼굴선이 가늘고 곱다랗다. 고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생김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참 순해 보인다, 엄마가 좋겠다는 말들을 종종 들었다. 궁금했다. 정말로 순하기만 한 아이가 있기는 한 걸까. 아이는 울음이 짧거나 잘 울지 않는 아이는 아니었다. 유별나게 많이 우는 편도 아니었지만 한번 울면 둘 다 진이 빠질 정도로 울어젖히기는 했다. 때때로 한 시간쯤 울곤 했는데, 목을 긁어대며 우는 소리를 그쯤 듣고 있노라면 꼭 하드코어 콘서트장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하드코어를 싫어한다. 들을 때마다 괴롭다.


사람들이 이를 알 리 없었다. 가족 간에도 속속들이 알기 어려운데 낯 모르는 사람이 던지는 이런 말에 그리 큰 의미가 담겼을 리 없었다. 인사 같은 것이었겠지. 아이가 예쁘고 착하다고 칭찬해준 것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되었는데, 그래도 생면부지의 사람이 애가 참 순하다고 할 때에는 그럭저럭 웃어넘길 수 있었으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면 자꾸만 기운이 쏙 빠져버렸다. 아이를 먹이고 달래느라 애썼던 일들이 거품처럼 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거저 크는 아이가 어디 있나, 반발심이 생겼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육아하는 나날 또한 매번 쉽거나 어렵지 않은, 그냥 인생의 어느 한 시기일 뿐이다. 대개 모든 일이 마냥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것처럼 아이를 돌볼 때에도 어느 날에는 아이와 쿵짝이 잘 맞아 늘 오늘 같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순조롭다가 어느 날엔 여기가 지옥인가 싶다. 그러니 누군가는 아이의 일면을 보고서 순하다고 말할 법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두고서 쟨 운이 좋아, 같은 말을 하면 그냥 씩 웃으며(‘네가 뭘 알겠냐’)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육아를 할 때에는 그러지 못했다. 아마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육아를 위해 뭘 포기했는데. 아이를 먹이고 재우느라 어떤 노력을 하는데. 얼마나 힘든데.


지금 같았으면 꿍얼거리고 있는 과거의 나에게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뭐, 누가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협박했어? 그렇게 안 하면 죽인대?


그렇다. 모두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내가 걸정한 일이니 이걸 위해 뭘 포기했는지 계속 상기할 필요는 없었다. 몸이 힘든 건... 당분간은 어쩔 수 없었고.


지금도 아이와 함께 거리에 나가면 여러 말을 듣는다. 대개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이를 귀여워하는 말들인데 아이가 좀 크고 나서부터는 그 외에 더 듣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둘째를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탄 택시에서, 아이를 데리고 간 놀이터에서 자주 듣는다. 아이가 얘 하나냐, 둘째를 낳아야지 안 그러면 외롭다, 아이가 다 크고 나면 하나 더 낳을걸 하고 후회한다, 첫째가 아들이니 둘째로 딸을 낳으면 딱이겠다,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웃으면서, 그냥 하나만 낳으려고요, 하고 대꾸했는데 당연하게도 그럴수록 말이 더 길어졌다. 그럼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가.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먼 곳을 쳐다보며 안 생겨서요, 라 답하라고 했다. 그럼 대화가 짧아진다고. 게다가 거짓말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안 생기게 조치하고 있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그러게. 나는 왜 쓸데없이 솔직하였던가. 어차피 다 흘려듣고 있었으면서.


다행히 지금은 지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이야기에 덜 신경 쓴다. 이런 일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 드물게 화날 때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뿐이라고, 아마 할 말이 없어서 한 인사치레겠거니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건 시간이 흘렀고, 아이도 컸고,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노력했다거나, 크게 성장하여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전 10화 보통이라는 굴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