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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람 Oct 17. 2022

육아의 시작

우리는 쑥쑥 자란다

조리원은 답답했다. 방 크기만 따져보자면 우리 집 거실보다 넓었는데 방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냉장고부터 리클라이너 소파까지 꽉꽉 들어차 있는 데다 무엇보다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내내 공기가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말하길 조리원을 나가면 육아 지옥이 펼쳐진다 하였지만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 안을 활보하며, 가끔은 바깥을 산책하며 아이를 돌보고 싶었다. 다행히 시간은 더디게 흐르지 않았고 곧 아이를 안고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알았다. 그동안 새벽의 신생아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나는 잠이 많다.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 소원이 너무 누워 있어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플 때까지 늘어지게 자보는 것이었다. 늘 잠이 부족했는데 잠이 부족하도록 공부해서는 아니고 이리저리 눈치 보느라 쪽잠을 자서 그런 것이었지만 정말로 어느 날엔 시체처럼 꼼짝 않고서 잠만 자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에 엄마가 외출하고 돌아와서는 넌 잠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더라, 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절에 갔다가 내 사주 비슷한 것을 듣고 왔다고. 잠에 대한 진정성이 사주에 새겨져 있을 정도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을 억눌러야 하는 게 애석했다. 대학은 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곳을 다녔는데 독립하지 않고 여전히 집의 내 방에서 놀고 자는 나의 모습에 질린 엄마가 널 보면 속이 뒤집어진다며 아침 일찍 외출을 감행하곤 했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더욱 잘 잤다. 그 뒤로 줄곧 잘 자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잘 수 없는 상황이 닥치자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신생아는 잠을 푹 자지 못한다. 잠 많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도 세네 시간에 한 번씩은 깨어나 운다. 집에 막 돌아와서 아이를 돌보기 전까지는 저 말이 그래도 세네 시간은 잘 수 있다는 말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이가 일어나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인 다음 트림을 시키고 재운다. 운이 좋으면 곧장 자지만 대개는 삼십 분, 종종 한 시간씩 깨어 있다가 잠든다. 그러곤 분유를 먹은 지 세네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일어나 운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잠이 부족해 눈앞이 핑 돌았다. 어지러웠다. 조리원을 나와서 삼 주쯤을 대전 집에 머물며 엄마와 함께 아이를 돌봤는데, 덩달아 잠을 못 자는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솔직히 혼자서 아이를 돌봤다면 반쯤 미쳤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엔 이런 적도 있었다. 늦은 오후에 아이를 재우다가 그 옆에서 잠들어버렸다. 한순간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는데 옆에 낯 모르는 아이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웬 갓난아이가 우리 집에 누워 있지. 부엌에서 엄마가 호박이나 무 같은 걸 통통 써는 소리가 들리기에 엄마, 웬 애야, 하고 물어보려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낳은 아이란 걸. 깊게 잠들고 일어나서 여기가 어딘지, 지금 몇 시인지 헷갈릴 때는 종종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임신하고 출산했던 일, 아이의 존재를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하고 웃어버렸다. 몸이 고되긴 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도 엄마 덕분에 아이를 돌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더 이상 육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를 어떻게 씻겼었는지, 무얼 먹였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당연했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셋이었고, 막냇동생의 나이가 스물여덟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와 함께 아이를 돌봐주었다. 여동생이 나보다 70일 먼저 아이를 낳았는데 그때 다시 배워두었다면서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아이를 도맡아 씻겨주었고, 나와 아이의 잠자리 옆에 이불을 깔았다. 끼니마다 미역국을 끓여주었고 내가 꾸벅꾸벅 졸면 한숨 자라면서 아이를 안아들었다. 무엇보다, 항상 옆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눠주었다. 지금이야 육아에 여유가 생겨 악쓰며 우는 아이를 봐도 귀여워 보이지만 그때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가 나도 덩달아 울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답답했다. 어느 정도 자란 뒤부터는 원인과 결과를 따져 묻고 방법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그런 추측이 불가능한 세상에(어떤 육아서에서는 배고플 때, 기저귀가 축축할 때의 우는 소리가 다르다고 하였지만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별안간 떨어지고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그럴 때 옆에 엄마가 있어서 좋았다.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 나의 화와 당황스러움이 한풀 꺾이는 듯했다. 같은 걸 보고 들으면서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나아졌다. 엄마가 주는 밥을 먹고, 엄마 옆에 누워 부은 다리나 팔 같은 델 통통 두드리면서 육아가 다 그렇다, 별스러울 것도 없다고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의 보호 아래 나도 아이도 조금씩 자랐다.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는 일들이 있다. 육아도 비슷했다. 조리원에 있을 때만 해도 아이가 너무 작고 연약해 보여 몸이 닿을 때마다 바짝 긴장하곤 했는데, 직접 아이를 안아 방으로 데려와야 했던 조리원 첫날에는 몹시 당황하여 방문 앞에 수분 서 있기까지 했다(병원에서는 아기 침대에 태워 데려왔다). 신생아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아이를 잘 안아드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아이의 머리는 왼손으로, 몸은 오른손으로 받쳐 안고 있어서 방문을 열 손이 없었던 것이다. 몸과 머리가 뻣뻣하게 굳어서는 이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관리인이 문을 열어준 덕분에 방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방문을 조금 열어놓고 아이를 데리러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를 안고서는 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리원의 여자가 크게 웃었다. 아이를 세워 안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아이의 얼굴을 어깨에 얹어서 반듯이 세워 안으면 필요할 때마다 아이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떼고서 방문을 열거나 물건을 집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아이를 엉거주춤 안게 되었는데 어깨와 한 손으로만 아이를 지탱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나 조리원을 퇴소하고 나서 아이와 딱 붙어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자 여자의 말처럼 금세 아이를 세워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배꼽도 능숙하게 소독했고 기저귀도 재빠르게 갈았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로 40도의 물에 분유를 녹여 아이에게 먹인 다음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켰다. 막연히 두려워했던 이런 일들이 실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기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걷히는 듯했다. 여전히 아이가 우는 이유가 아리송했고 몸은 고되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육아에 자신감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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