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대전에서 살다 서울에 직장을 잡은 스물다섯, 그때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대전에서처럼 집에 가면 부모와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동네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남자 친구도 생기고 동네는 아니지만 서울에 친구도 두엇 생기고 대전에 있던 친구 몇도 서울로 왔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예전과 달리 무슨 일이 생기든 대개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결혼을 앞두고서는 걱정도 되었다. 아이를 낳으면 누구의 도움도 받기 어렵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이를 키울 때 부모님, 특히 엄마의 도움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셋을 키우고 이제 살 만한 엄마에게 또다시 아이를 맡길 순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육아를 부탁하면 엄마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참 건방진 생각이었다. 엄마 인생의 가치는 엄마가 정하는 것이고, 내가 우선이라고 여기는 가치가 절대적인 것도 아닌데. 엄마도 아이를 전적으로 맡아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그게 나와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도움을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직장 생활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회사를 두 군데 다녔는데 첫 번째 회사에서는 육아 휴직을 쓰는 사람을 보질 못했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한 명이 출산하고서 3개월 뒤에 복직했다. 결혼하고 나서 취업한 회사에서는 임신 계획이 있는지 그게 언제인지를 물었다. 3차 면접인가에서 전무가 이런 말도 했다. 아이를 낳지 말라는 게 아니고 3개월만 쉬다 오라는 거지. 육아 휴직이 더 필요하면 회사를 관뒀다가 다시 들어오면 되잖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100일을 키운다고 해서 어엿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상사는 입사한 지 수개월이 지난 회식 자리에서 날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실력이 아까워서 그러지, 아까워서. 엄마가 대전에 계신다고? 올라오시라고 해. 그래야 회사를 다닐 수 있어. 그건 상사의 경험담이었다. 상사는 아이 둘을 한 시간 거리에 살던 엄마에게 보냈고 나중엔 살림살이를 합쳤다. 엄마가 없었으면 아이의 등하원을 제때에 못 시켰을 것이고, 아이가 아플 때에는 허둥지둥하다가 결국엔 회사를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있어서 안심하고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건 맞는 말이었다. 상사가 이혼한 것은 아니었으나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상사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서울로 불러올 생각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는 내가 키우는 게 맞았다.
그때는 직장 생활을 해야만 삶이 의미 있다고 여겼었다. 대학을 사 년 다니며 공부했는데 직장을 꼴랑 오 년쯤 다니고서 관두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나의 전공을 좋아했고, 전공을 살려서 취업했고,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허투루 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직장 생활은 늘 힘겨웠다. 왜 그렇게 진행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태반이었고 부장이나 전무는 언제나 미간에 주름을 잡고 다녔다. 나중에는 부장의 발소리만 들려도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서는 원하는 만큼 성실하게 일할 수 없었다. 그러기보다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적당히 일하는 걸 좋아했다. 주어진 시간은 항상 빠듯했고 대가는 쥐꼬리였다. 회사를 다니며 좋았던 것은 그래도 다달이 돈을 쥘 수 있다는 것, 가끔가다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 그뿐이었다. 그 밖의 것은 다 별로였다. 견디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고 거듭되는 스트레스 때문에 심신이 아프기까지 해놓고서 다시는 회사에 다닐 수 없을까 봐 우울해했는데 한번은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으면서 운 적도 있었다. 별일 없이 출퇴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시 일할 수 있을까, 내 삶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회사 생활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놓기가 어려웠던 걸까.
도시에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 도시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돈이, 그것도 큰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두가 흡족할 만큼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려면 그만큼 능력이 출중해야 하는데 이는 대개 좋은 학벌 등을 갖춰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로 능력이 증명된다. 능력이 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도시는 땅을 파서 푸성귀를 길러 먹거나 닭을 키워 알을 받아 먹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는 것,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 제일 가치 있는 일이고 이런 일을 능히 해낼수록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따져봤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유능했던 적이 없었다. 지방대를 나왔고 직원이 다섯 명도 안 되는 회사를 다녔으며 연봉은 바닥이었고 복지 같은 건 사치였다. 그런데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시민으로서는 유능하지 못했지만 작은 회사 안에서는 썩 유능한 축에 속했고 그게 내가 드러낼 수 있는 내 능력의 전부,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내 일이 마음에 들었고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나의 사회 생활은 망했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일 년을, 두 번째 회사에서는 삼 년 반을, 세 번째 회사에서는 일 년을 다녔다.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각각 다섯 개쯤 댈 수 있지만 어쨌든 길게 다닌 회사는 없는 게 사실이다. 외주를 받아 일한 것까지 따져봐도 직업인으로서의 경력이 길지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사회 생활을 했다고 그렇게 간절했나 싶다. 돈이라도 많이 벌었으면 모를까. 그러나 나의 연봉은 너무 작고 소중해서 이게 나를 증명하는 거라면 내 능력은 바닥을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때는 너무 적은 돈에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 날엔 동생에게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첫 월급을 받았으니 언니에게 용돈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뱃심 좋게 됐어, 네가 무슨 용돈을 줘, 라고 대꾸해놓고 전화를 끊고서는 눈물을 쭐쭐 흘렸다. 지금 같아서는 냅다 받고서 더 달라고 징징거렸겠지만 그때에는 동생이 두둑이 받은 월급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나까지 챙겨준다는 데 자존심이 상했다. 받는 돈이 적으니 월세로 월급의 반절이 날아가버려서 모자란 생활비는 아빠의 카드로 충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 월급 턱 같은 건 상상도 못 하고 있다가 동생의 전화를 받고서야 선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돈을 벌어봤자 수중에는 쥐뿔도 남지 않는다는 걸. 거듭 생각해봐도 내가 들어온 직업 세계의 도덕관이 수상했다. 바깥으로는 평등과 정의를 외치면서 안으로는 나를 부정하며 자꾸만 값을 후려쳤다. 그런데도 나는 회사를 놓을 수 없었다. 적은 돈이라도 벌어야 먹고살 수 있는 데다 돈을 벌지 못하면 꼭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나서는 회사의 삶과 멀어진 듯해 더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겉으로는 유유자적해 보였을지라도 속으로는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는데 그래서 의식적으로 나를 더 위했다. 이전의 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에게 애착 인형을 만들어줄 시간에 책을 한 장 더 읽었다. 안 나오는 젖을 달래면서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보다 얼른 단유하고 분유를 주는 등 그 상황에서 제일 나아 보이는 선택을 했다. 누차 말했다시피 나는 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었으나 다행히 아이의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어느 정도 나를 지켰다.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아이가 내 몸 밖으로 나오면서 쇄골이 부러진 것도, 두혈종이 생긴 것도, 그 밖의 여러 문제가 생긴 것도 모두 출산이란 게 그만큼 어려워서, 너와 내가 그만큼 고생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여겼다. 둘 다 그 순간을 열심히 버텨냈는데 다만 조금 운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깨달은 바지만, 대개 많은 경우에 엄마는 아이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주보호자이며 가장 큰 가해자였다. 무슨 일이든 책임은 주로 엄마에게 있었다.
친구의 아이가 걸음을 조금 늦게 걸었다. 또래의 아이 대부분이 걸어다닐 즈음에도 아이는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 못했다. 친구의 걱정이 컸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곧 걸으리란 걸 알면서도, 한동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다가 별안간 왜 못 걷는 거지 초조해하며 이런저런 병명을 검색해볼 것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임신했을 때 잘 챙기지 못한 것, 이를테면 철분제를 시기대로 잘 챙겨 먹지 못한 것이라든가 아이가 태어나서도 일하느라 잘 신경 쓰지 못한 것 등등이 떠오른다고. 혹 자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네 잘못이 아냐, 너무 걱정하지 마, 곧 걸을 거야. 이런 말을 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모습이 좀 가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분명 우리의 탓이 아닌데 그런 건 생각지도 못하고서 저희끼리 몸을 토닥이며 위로하고 위로받은 작은 존재들. 엄마라는 이유로 더 책임지고 더 놓아버린다. 모체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실은 그렇게 가련하기만 한 것도 아닌데 그걸 빨리 깨닫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