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람 Sep 30. 2022

이상한 세계에 왔다(1)

평생을 대전에서 부모님과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시작한 나는 부모님에게 남자 친구가 있단 사실을 뒤늦게 알렸는데 자취와 남자 친구라는 단어의 조합이 어떻게 들릴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빠는 결혼 전까지 남자 친구를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결혼 전까지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하는가 싶었지만 아빠 생각에 따르자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정한 시기가 되면 결혼을 결심하고서 이성을 만나면 된다. 선을 보든 친구에게 소개를 받든. 아빠가 그랬듯이. 그래도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남자 친구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체 접촉이 밀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염려된다고. 엄마가 생각하는 남자 친구란 정말 성별이 남자인 친구, 남자인 동료를 말했다. 그러니 부모님에게 남자 친구가 있단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고, 밝힌 뒤에도 굳이 남자 친구와 함께 있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내 옷이 전날과 같은지, 아니면 남자 친구의 옷이 전날과 같은지, 왜 나의 집엔 베개가 두 개나 있는지 궁금해했다. 베개는 엄마가 직접 두 개들이 한 세트를 사준 것이었는데 우리 집에 놀러온 사촌 오빠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니 참 궁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가 한 개든 두 개든 세 개든 그건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베개가 세 개여서 놀라울 일이 있으려면 내 머리가 세 개여서 베개 또한 세 개인 것, 그런 게 놀라운 것일 테다. 참 지겨웠다.


차라리 간밤에 섹스했냐고, 남자 친구가 종종 자고 가냐고 묻는 게 나았겠다. 은근히 암시하고 짓궂게 웃고 어깨를 툭 치고 옷을 가리키면서도 섹스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못하는 행동들이 나도 그들처럼 섹스를 두렵거나 우스운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치는 듯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분명 이런 취급을 당해왔건만 결혼식만 올리면 순식간에 이미지 업데이트가 된다는 점이다. 쾌락뿐만 아니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숭고한 행위란 이미지를 덧입는다.


결혼식을 올린 지 삼 년이 지났는데도 엄마 아빠에게 임신 소식을 전할 때에는 좀처럼 말문을 떼기가 어려웠다. 임신했다는 말은 섹스했다는 말을 전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남편과 한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색했는데 임신했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니.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다가 슬쩍, 남 이야기를 전하듯 쭈뼛거리며 임신 소식을 알렸다. 임신 소식이 들려올 때가 조금 지난 게 아닌가 하고 염려했던 엄마와 아빠는 아니나 다를까, 엄청 기뻐했다.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드디어 내가 어느 문턱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선으로 나뉘어 있었던, 임신할 수 있고 임신하는 게 당연하고 임신하면 기쁜 세상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그제야 선명하게 느껴졌다.


생경했던 선 너머의 세상을 몸으로(임신과 출산) 지나오면서 그래도 이제 조금은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이를 낳지 않았는가. 그러나 산후조리원에 입소하고서 깨달았다. 바깥과 유리된 이 세계야말로 선 너머의 세상을 응축해놓은 것 같은 정말 생경한 곳이라고. 임신과 출산은 입학 과정에 불과했고, 조리원 생활이야말로 대학 생활이 시작되기 직전에 떠나는 오리엔테이션 같은 것이라고. 그렇다. 신기하고 이상한 세계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전 04화 출산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