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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람 Sep 28. 2022

출산하다

토옥, 뾱

아이는 엄마 아빠가 있는 대전에서 낳기로 했다. 출산 예정일을 삼 주 앞두고서 대전으로 갔고 여기서 새 병원의 의사를 세 번쯤 보고 출산할 예정이었다. 실제로는 딱 두 번 진료받고서 아이를 낳았다.


임신에 무지했던 내가 출산에는 밝았을 리 만무하다. 예정일이 이 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어떤 방법으로 아이를 낳게 될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자연분만인가 제왕절개인가. 의사에게 물으니 다음 주에 내진하여 출산 방법을 정하자고 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던 그 내진이었다. 사실 나는 내진이 별로 두렵지 않았는데, 어느 주수에 이르기 전까지는 매번 질초음파를 본다는 사실에 한 차례 놀랐던 경험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당연히 드라마에서처럼 배 위로 초음파를 볼 줄 알았는데 질초음파를 본다는 것이 아닌가. 그때 했던 질초음파를 생각하니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습득해둔 내진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예정된 내진은 하지 못했다.


병원 예약일을 이틀 앞둔 새벽 세 시 반, 여느 날처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서 변기에 앉아 오줌을 누는데 희미하게 토옥, 소리가 들렸다. 이게 내 자궁 근방에서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진 건지, 정말로 그 소리가 들리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정말로 소리가 났다고 해도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런 소리에서부터 출산이 시작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다시 자리에 누워 잠들려고 몸을 뒤척거리는데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팬티가 축축했다. 다행히 피는 아니었고 맑은 물이었다. 그때 알았다. 아, 이게 양수인가 보다. 아까 그 토옥 소리는 양수가 새려고 난 소리였구나. 양수는 터지는 것이라 생각했고, 터진다면 발밑으로 쏟아져내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찔끔찔끔 샐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전 주에 태동 검사를 하면서 출산 시 주의 사항을 들어놓았다. 양수가 터지면 절대 씻지 말고, 팬티에 생리대를 받쳐 입고서 얼른 병원으로 달려올 것.


엄마 아빠를 깨웠다. 저기, 나 애 낳으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빠는 허둥지둥 차 키를 찾았고 엄마는 미리 출산 가방을 싸놓지 않은 나의 등 뒤에서 그러게 미리 싸놓지 그랬냐, 하고 말했다가 어차피 병원이 멀지 않아 필요한 건 재깍재깍 가져다줄 수 있으니 대충 싸서 얼른 출발하자고 말했다. 남편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남편을 깨우기 위해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정말 수십통을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결국 옆 골목에 살던 남편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문 비밀번호를 알려준 뒤에야 남편이 일어났고, 대전에 도착한 건 아이가 태어난 뒤였다) 입원에 필요한 서류는 내가 직접 작성해야 했는데 차 타고 오면서부터 시작된 통증 탓에 제정신이 아니어서 집주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 집이 501호인지 502호인지 헷갈렸다. 그런 중에 척추 주사에 대한 두려움이 떠올랐고, 통증 때문에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로 간호사에게 물었다. 주, 주사는 많이 아픈가, 가요. 간호사가 답했다. 아파도 아이 낳는 것보다야 덜 아프겠지요. 실제로도 그랬다.


아이를 세상 밖으로 태어나게 한 사람이 친모라면 내 아이의 친모는 두셋쯤 있는 셈이다. 나, 내 몸에 올라타 아이를 밀어내던 간호사 하나, 내 질을 자극했던(제정신이 아니었어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간호사 하나. 나는 운 좋게 네 시간만 진통하고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무리 무통 주사를 맞았다고 하더라도 말 그대로 손이 덜덜 떨리도록 아팠어서 진통 시간이 짧은 걸 체감하지 못했다. 칠십 일 먼저 아이를 낳은 여동생이 말하길 무통 주사를 맞고 나면 별로 아프지 않다고 하였는데 왜 나는 이토록 아픈 것인가. 그러나 의사는 그 정도면 주사가 잘 받는 편이라고, 지금 자기 말을 다 알아듣는 데다 소리도 지르지 않고 있지 않느냐고, 만약 주사가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기엔 비명이 난무했을 거라고 날 독려했다(젠장). 의사 말대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뭐가 뭐인지 잘 모른 채로, 더욱이 열까지 나 정신이 없는 상태로 마지막엔 이런 질문까지 했다. 저, 지금 아기 낳는 건가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궁이 다 열렸으니 힘 주는 걸 연습해보자 하였는데 열이 좀 나니 진통을 호흡으로 흘러넘기라고도 하였고, 또 다 나온 것도 같다고 하여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게 된 것이었다. 의사가 네, 아기 낳는 거예요, 하고 대답해주진 않았지만 아기를 낳을 타이밍이었나 보다. 힘을 주라고 했다. 힘을 줬다. 제대로 힘주지 못한다며 다시 힘줘보라고 했다. 힘을 줬다. 더 힘주라고 했다. 결국엔 의사가 간호사를 내 몸 위로 올려보냈고, 의사는 내 질을 주시하며 지금 아이도 너무 힘들어요, 엄마가 더 힘줘야 돼요 등의 말로 날 독촉했다. 의사의 말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의 고통이 실감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내 고통은 너무나 실체적이었다. 얼른 끝내고 싶어 계속해서 힘을 줬다. 얼굴의 핏줄이 다 터지도록 힘을 줬다. 드디어, 아이가 나왔다. 아직도 아이가 몸속에서 꿀렁 하고 빠져나가던 느낌이 생각난다. 다슬기나 소라에서 살을 바를 때처럼 아이가 뾱 하고 빠져나왔다. 마침내 지독한 변비가 끝난 느낌이었다. 아, 그 쾌감이란.


아이는 간호사들의 손에서 태지를  벗겨낸 모습으로, 몸에  수건을 둘러매고서 병실로 돌아왔다. 간호사가 아이를  팔에 안겨주고서 얼마나 예쁜지 보라 했다. 아이는 정말 인형처럼 작았으나, 존재만으로 예쁘고 귀여웠으나, 얼굴이 예쁘지는 않았다. 예쁘기보단 못생겼었다. 내가  태어났을  아빠가  보고 불타는 고구마라 했다던데  그런 말을 했는지   같았다. 당황하여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어색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며 포즈를 취했다.


아이를 낳은 그날부터 사흘간은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계속해서 보고받았다. 오른쪽 두피 아래에 피가 고여 꼬깔콘처럼 보이는 두혈종이 제법 크게 생겼고, 쇄골이 부러졌고, 일자 손금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다운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가 일자 손금이라고 한다. 나는 뒤늦게야 아빠 손금이 일자인 걸 떠올렸다). 안 그래도 걱정을 사서 하는 나였기에 이것저것 검색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지만 후에 보니 쇄골은 한 달도 안 되어 붙었고, 두혈종은 일 년쯤 지나니까 티가 잘 안 나는 것도 같았는데, 난다 하여도 머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니 두상 또한 완만해질 것이었으며 머리카락 덕분에라도 눈에 띌 일이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히 이야기하지만 실은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에야 깨달은 것들인데  그렇다면 지금은 사서 고민하지 않느냐, 그게 또 그렇지 않다. 아이의 나이에 맞게 어떤 고민들은 뒤로 가고 또 어떤 고민들이 새로 온다. 그렇게 고민에 휘둘리며 살지 말자고 다짐하는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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