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시계가 필요치 않기로 했다]
시계를 벗기로 했다. 마라톤 대회 출전한 지 18년 동안 가끔 시계를 집에 두고 와서 그냥 뛴 적은 있지만, 의도적으로 벗어 본 적은 없다. 마라톤은 기록경기여서 유일한 계측 수단인 시계를 벗는다는 것은 납득이 어렵지만, 이제 시계가 필요치 않기로 했다. 달리면서 자신의 속도와 심박 수 등을 체크하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초를 다툴 만큼 잘 뛰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뛰어야 큰 의미도 없다.
과천마라톤은 관문체육관을 출발해서 양재천을 따라 서초구, 강남구 일원까지 다녀오는 왕복 코스로 설계되었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들도 더러 보인다. 아마 5km 걷기 행사에 참석한 단란한 가족인 듯하다. 주말에 늦잠 잘 시간에 가족과 함께 의미 있는 이벤트에 참석한 아이들이 기특하다. 3,000여 명의 마라토너들이 결기를 다지며 몸 풀고 각종 이벤트에 눈길을 돌리기도 한다. 11월에만 전국에 100여 개의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으니 마라톤이 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 운동으로 정착했음이 실감 난다.
출발 준비 중에 여느 때와 다르게 허전하다. 집에서 나설 때부터 아예 시계를 차고 오지 않았다. 출발할 때, 정확한 계측을 위하여 시계를 설정하는 게 제법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게 뭐라고 조금의 오차도 줄이기 위하여 긴장했던 일들이 조금은 김 빠지는 일이 되었다. 이제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이 뭔가 조화롭지 못하지만 견딜만하다. 오히려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그동안 달리는 도중에 왜 시계를 자주 쳐다보며 자신을 닦달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계를 보며 자신을 옥죄면 더 빨리 달리거나 자신을 컨트롤할 능력이 생긴다면 당연, 시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시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의 능력치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만 조급할 뿐이다.
시계를 떠올리면 사춘기 시절이 상기된다. 중학생 되면서 친구들이 시계를 차기 시작했다. 한 반에 절반 이상은 시계를 차고 다니던 시절에 나도 시계가 몹시 갖고 싶었다. 시계만 있으면 공부도 더 잘할 것 같고, 더 의젓해질 것 같은 생각에 간절히 원했지만, 시골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집안 형편에 시계를 장만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다. 고등학교 유학생 시절에도 시계는 막연한 꿈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잠시 직장을 가졌던 시절에는 시계를 장만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괜한 오기가 생겨 일부러 시계를 멀리했다. 아마 사춘기 아이들이 근거 없이 트집 잡는 맹목적인 반항 같은 것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시계를 갖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도 그렇게 갖고 싶었던 시계를 외면했다.
결혼 예물 시계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유행하던 금색으로 도금된 번쩍번쩍한 시계를 손목에 차고 한동안 의기양양했다. 시계 갖고 싶어 안달했던 시절부터 15년 지나서 인생 첫 시계를 만난 셈이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시계를 몇 년 차고 다니다가 핸드폰이 생기기 시작하던 때부터 자주 차지 않고 행사 때나 차는 액세서리로 변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절대적인 기능이 큰 의미를 상실했던 시기다. 서랍에서 뒹구는 시간이 길어지다가 어느 순간 눈에 띄지도 않는다.
마라톤 시작할 때, 스톱워치 기능과 거리 타이밍이 가능한 시계가 필요해서 하나 장만했다. 직접 돈 주고 구매한 첫 시계다. 평소에는 차지 않고 달리기 할 때마다 찼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스마트워치를 생일선물로 준비했다. 달리기 할 때 유용한 최신 기능들이 탑재되어 있어 편리하고 좋기는 하다. 그런데 시계가 달리기의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맺혔다. 달리기에 굳이 시계가 필요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번 대회는 시계를 벗어버리기로 마음먹고 출정한 첫 대회다. 첫 느낌은 어색했지만 간편하고 담백한 맛이 있어서 나쁘지 않다. 나의 마라톤 기록은 개인별 칩에 정확하게 기록될 테고, 전체 기록이나 구간별 기록 등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일이 없다.
작년 이 대회에서 잠깐 걸었던 18km 지점에 다다르니 골반 근육이 조금 뻐근하다. 지난주 지리산 종주 산행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걸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달리기로 했다. 시계를 봤다면 기록을 의식하여 무리하게 달리다가 감당하지 못해 걸었을 수도 있었다. 시계가 없으니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리듬에만 열중할 수 있어서 세상 편하다. 그동안 시계는 족쇄였다. 인간이 설정하고 가둔 시간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해 안달하며 살았던 세월이 허허롭다. 물론 시계가 없다고 해서 기록으로부터 아주 해방되지 못함을 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니까.
시계가 필요치 않다고 해서 시계와 아주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연습할 때는 시계를 꼭 차야 한다. 달리면서 자신의 리듬과 속도, 케이던스, 심박 수 등을 체크하고 자신의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 관리하기 위해서 스마트워치는 필수 아이템이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군대에서 사용하던 구호다. 마라톤도 그와 별다르지 않다. 연습할 때는 기록과 호흡, 심박 수 등 꼼꼼하게 체크하여 자신을 담금질하고, 대회 때는 시계를 벗어버리고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영혼을 장착하여 연습하는 마음으로 달릴 것이다. 60대 중반의 마라토너에게 기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리듬에 따라 멈추지 않고 함께 호흡한다는 것이 더 소중한 가치다.
[일시] 2025년 11월 9일
[대회] 과천마라톤(과천, 양재천 일원)
[기록] 1시간 53분 58초(Ha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