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철학-지명 속의 세계관-을 생각하다 3화)
살아가면서 의도와 다른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왕왕 있다. 젊어서는 의욕이 앞서고 나이 들어서는 조심히 오히려 상황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현재 삶에도 음양의 조화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데.
무엇이 음양陰陽일까?
천문의 관점으로 말하면 태양은 양 달은 음이고, 시간으로 보면 봄여름은 양 가을겨울은 음에 해당된다. 생명으로 보면 살아있을 때는 양이고 죽은 후 음이라 했다.
음양이론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 대립과 보완의 성질이 상호 작용한다는 철학이다. 이 사상은 중국 상주商周시대에 출현하였고 우리 겨레에는 삼국시대에 유입되었다. 그 이후 유교 특히 성리학의 활약에 힘입어 일상생활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그 위세는 상당하다.
이런 철학의 세계에서 삶을 살아오다 보니 삶터의 지명 짓기에 음양의 글자가 사용됨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지명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보자.
음과 양의 글자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남송학자 홍매는 그의 저서 용재수필에서 군현郡縣에 사용되는 음과 양의 글자에 대해 산의 남쪽은 양, 물의 북쪽도 양이라 하였다.
유교경전인 곡량전에는 산의 북쪽과 물의 남쪽은 음이라 하고,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은 양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춘추시대부터 산맥의 남쪽을 산양山陽, 강물의 북쪽을 하양河陽이라 불렀고 반대로 산맥이북은 산음山陰, 강의 이남은 하음河陰이라 하였다.
이를 지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중국 국토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중요한 강의 흐름은 서에서 동으로 향한다. 북반구 햇빛은 남향에서 북쪽으로 내리쪼인다. 그래서 생각하길 지면의 산은 높아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남측은 양지로 양이라 하고 북측은 음지이다 보니 음이라 하였다.
물은 지면보다 낮아 물에서 보면 강의 북쪽 대안은 양의 면이고 강의 남측면은 음의 면이라 여겼다. 이런 생각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규칙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군현 지명에 양과 음의 글자가 사용되었다.
지명에 양의 글자가 훨씬 많다. 그 이유를 뭘까?
산의 남쪽 비탈과 강의 북안은 햇볕이 좋고 여름철 강우량도 상대적으로 충분하다. 또 강물의 흐름으로 둔치가 받은 충격이 적어 토양도 건실하다. 그래서 농작물 재배에 적합하고 생산에도 유리했다. 삶터도 이러한 곳에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반대로 음의 지역은 환경이 상대적으로 생산에 적합지 않고 큰 규모의 삶터 형성도 어려웠다. 또한 음지는 나쁜 기운이 모여 빙빙 돈다고 생각했다. 늦어도 진한秦漢시대에 이런 설명은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으로 지명에 양의 글자가 선호된다. 단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양자 간의 구체적 차이는 점점 축소되었다.
음과 양의 글자가 있는 지명을 보자.
음의 글자가 사용된 지명의 숫자는 예전에도 적었고 현재 남아있는 이름도 적다. 오늘날 기준으로 살펴보면 양 글자 있는 현縣이상 지명은 백 곳이 넘는다.
양의 글자가 있는 유명한 곳을 보면, 심양 구양 낙양 안양 양양등이다. 서한 초 정치인 역이기는 자신을 고양주도高陽酒徒라 칭했고, 제갈량이 자신 이력을 나타낼 때 남양에서 농사한다躬耕于 南陽하였다. 당양當陽현은 조운이 혼자서 유선을 구해 유명해진 지명이다.
음의 글자를 가진 현급 이상의 지명은 십여 곳이 보인다. 화음 양음 강음 상음 회음구등. 동한학자가 쓴 한서집해에 248개 지명이 나오는데 양의 지명이 41개, 음의 지명이 딱 3개(산음 여음 양음) 나온다. 이 시기만 보아도 양 글자를 좋아하고 음을 싫어함을 알 수 있다.
음 글자기 있는 지명은 역할도 미약하고 발전하지 못했을까?
섬서성 화음시는 화산의 북쪽 비탈 지역에 있는데 지명만으로도 구체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화음시는 교통이 불편하여 발전이 늦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전란시기 오히려 교통이 불편함에 힘입어 안전했다.
또 명문인 화음 양 씨를 키워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등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음의 글자를 가졌으나 천년 넘게 발전을 지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탕음은 탕수 이남으로 위치는 화복평원과 태항산맥의 만나는 교통 요지로 전쟁 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요충이었다. 그러하다 보니 훼손과 재건이 반복되어 왔다. 그렇지만 꺾이지 않는 정신을 발휘하여 영웅 악비를 태어나게 하는 터전이 되었다.
강음은 예전 호수인 기호 북쪽에 있어 기양이라 불렸었다. 남북조 시기 장강 남쪽이라 하여 강음으로 개명되었다. 위치가 장강의 목젖에 해당되어 적의 침입을 막는 요새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중국제조업의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수량으로만 본다면 양의 지명은 흥성하고 음의 지명은 쇠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음의 지명지역도 자연의 불리함을 이겨내고 발전해 옴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찬란함이 영원함은 어려우며 힘써 노력하면 어떠한 역경도 대응할 수 있다. 음과 양의 구분에 예전처럼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된다. 양과 음은 서로 의지하고 보완하였다.
양의 지명이 훨씬 많다.
지명중에서 음과 양의 글자가 쓰인 곳이 10~20% 정도나 된다고 한다. 군의 지명에는 매우 적게? 나타나고 마을 이름에는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양의 글자는 양촌 양지마을 양지 뜰등 마을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시군처럼 큰 지역의 지명으로 양평 음성 한양 진주 밀양 청양 담양 함양등을 들 수 있다.
음의 글자가 있는 시군 이름은 없다?
시군의 이름 중 음의 글자가 있는 지역은 음성군 딱 하나이다. 음성陰城은 고구려 때의 이름인 잉홀을 신라 경덕왕이 음성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서 음은 늘어지다 홀은 성의 우리말로 넓은 곳 길게 늘어진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음성의 음은 그늘 어둠을 뜻과 관계가 없다.
음성의 지리 특징을 보면 한강 금강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자 요충지이다. 1906년 1914년 충주군과 음죽군 지역을 일부 병합하면서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마치 잉홀의 의미의 실현된 느낌이다.
음양철학은 중국에서 유입된 사상으로 음과 양은 서로 대립되나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서로 보완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시군 지명에 음이 하나도 없음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중국에서 들여온 철학이나 토착화의 과정에서 음양은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는 기본 개념을 무시하고 양지바른 지역만 좋아한 결과일까? 행정지명은 정치권력과 지역 이미지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합의하여 나타난 것으로 그 지역에 대한 인식의 표현이다.
혹은 삶터는 양의 의미를 가진 지역에서 선정하고 죽은 자가 사는 묘지는 음지인지라 부족한 음의 지명을 보완하려고 명당 찾기에 매진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