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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Sep 13. 2023

덜떨어진 지도자 이성계?
건국자의 이면(주원장 설화)

   조선의 건국한 이성계가 주원장 설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의 능력이 주원장보다 뒤떨어져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인데 왜 우리 설화층은 중국인인 주원장을 우리의 왕보다 한 수 높음으로 표현하였을까? 


왕조시대에 왕에게 불경은 무척 큰 벌을 당할 수도 있을 텐데! 설화의 내용을 알아보자


 - 구렁이가 환생한 주원장 -


강원도 깊은 산골에 절이 있었는데 밤만 되면 스님이 한 명씩 사라졌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바깥에서 숨어서 살피는데 과연 큰 구렁이가 나타나 한 스님을 물고 가는 것이었다. 


주지스님은 미리 준비한 독화살을 쏴서 구렁이를 죽이자 구렁이게서 영혼이 나와 어디론가 가길래 따라가니 어느 마을의 주씨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주씨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나중에 아들이 태어나 장성한 후 중국에 가서 싸우려고 이성계와 의병을 모집하였다. 


중국으로 가는 도중 백두산 근처에서 연못을 만나자 주원장은 헤엄을 쳐 건너가 중국에 가서 황제가 되었으나 헤엄을 못 친 이성계는 개성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  

         

- 천자봉의 주원장과 이성계 -     


무쇠 땜쟁이 주씨가 죽자 유언에 따라 아들부부는 천자봉에 묻으러 갔다. 장례를 치른 후 부부는 갑자기 전기가 통하여 무덤 옆에서 부부관계를 하였는데 후에 아들을 낳자 주원장이라 했다.    

 

커서 중원을 정복하러 가는 길에 주막에서 이성계를 만났다. 둘이 함께 밥을 먹는데 밥의 양이 주원장이 한 말 이성계가 반말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이 중국에 갈 필요가 없고 고려나 다스리라 했다. 


이성계의 부하가 자존심이 상해 고려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창피하니 반말도 한말이다 하자 하였다.     

그래서 소두는 작은 되로 한말, 대두는 큰 되로 한말이라는 말이 생겼다.    

      

- 주원장의 등극 -     


주원장과 이성계가 굼벵이를 사 먹는데 이성계는 1마리 주원장은 2마리였다. 주원장이 부처님께 대국천자가 될 수 있냐고 물었으나 답이 없자 부처 머리를 깨부수어 버렸다. 


그 속에서 예쁜 여자가 나왔는데 장자방의 누이였다. 장자방의 도움으로 천자가 되었다.   

  

- 이성계의 눈을 멀게 한 주원장 -   

  

사신이 이성계의 그림을 가지고 중국에 갔는데 주원장이 눈이 사나워 보인다며 그림의 눈에 칠을 하여 애꾸눈이 되었다.     


- 이성계보다 나은 주원장 -     


주원장은 조선사람이다. 이성계와 백두산 아래에서 함께 성장기를 보냈는데 주원장이 이성계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래서 이성계는 대국을 넘보지 않고 조선왕이 되었다.     


설화의 분포     


 이들 설화의 분포는 창원, 승주, 서산, 하남 등으로 현 지명이 사용되는 시기는 조선 이후다. 지명의 생명 지속력이 약하여 자주 바뀌었던 것이다. 


즉 개명의 주동 세력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욕구가 크나 일반백성들은 그들의 행위가 못마땅하여 반왕조적 이야기인 이성계와 주원장을 비교하는 설화를 만들었을까 한다.


- 전근대시대 먹는 밥의 양과 의미 -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밥의 양이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690g, 고려시대에는 1,040g, 고구려시대에는 무려 1,300g이었다 한다.     


삼국유사에 김춘추가 하루에 먹는 식사량이 쌀 3 말과 꿩 9 마리였는데, 백성들은 이를 보고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여송은 조선인들이 먹는 양을 보고 놀라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먹으면 국가 운영은 어떻게 하냐"라고 묻기까지 했다 한다.     


이처럼 과거 사람들은 현재보다 많이 먹었으며 먹는 양에 따라 인물의 역량도 관련 있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큰 그릇에 밥을  먹는 그림


주원장과 이성계에 대한 짧은 생각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수성가, 현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건국, 부인 또는 처가의 큰 모움, 자식들의 배신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출신(주원장 : 배고픔만 있는 농민, 이성계 : 잘 나가는 무인 안)과 직업생활(주원장 :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 이성계 : 무인직업에서 순조롭게 대성공)등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설화층인 백성들은 이성계보다 주원장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래도 왕조시대에 왕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왕의 못남을 거론함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척까지 위험함을 초래하는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설화에서 왕을 흠집을 내고 있다.


혹시 조선의 탄생을 못마땅해하는 기류가 오랜 기간 존재하여 백성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을까? 


즉 조선 개국에 고려의 상당한 지식층이 반대 또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들이 조선 중기 이후에 등장하는 사림파의 큰 흐름이 됐다고 했을 때 지방이나 시골의 백성들이 이들 지식층의 반정부적 감정에 공감하였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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