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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Sep 27. 2023

기획 봉사로 장수한 동방삭(설화1)

봉사활동의 대가를 바라면...

   

우리는 대보름달이나 새해 일출을 보면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현대인의 수명은 전통시대와 비교해 보면 이미 장수함에도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옛날 사람들도 이생에서 삶의 질이 매우 열악하여 오래 살아봐야 좋은 일 없었을 것이나, 역시 기도할 때 장수를 많이 소망했다. 이때 동방삭 처람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전통사회 장수의 롤모델인 동방삭의 설화 한편을 소개한다     


-동방삭이 삼천갑자(三千甲子, 1 갑자=60년)를 산 내력-        

 

동방삭이 다섯 살이 됐으나 무척 심술이 궂었다. 하루는 동구밖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맹인(앞 못 보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땅을 두드리며 그가 놀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는데 심술궂은 동방삭이 지팡이 끄트머리에 소똥을 발라서 맹인 입술 가까이 들이댔다. 맹인은 냄새가 나고 화가 나서 그 자리에 텁썩 앉아 산통(算筒, 점칠 때 사용하는 기구)을 흔들며     


“장난치는 놈 동방삭이지? 이 심술궂은 놈!”이라 말하며 다시 산통을 흔들고 나서

“이놈 큰 벌을 줄까 했더니 내일모레면 죽을 놈이니 내버려 둔다.” 하였다.   

   

곧 죽는다는 소리를 들은 동방삭은 잘못했다고 맹인에게 빌며  “지가 사실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만 내일모레면 죽는다 하니 기가 막힙니다. 명을 잇도록 도와주세요.” 하였다.    

 

다신 그런 장난을 아니하겠지? 니 일생이 딱해서 가르쳐주니 시키는 대로 해라.” 하였다.

동방삭은 집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맹인이 시킨 대로 돈 셋냥, 신 세 켤레, 밥 세 그릇을 준비하여 동구밖 맹인이 앉잤던 자리에 준비물을 정성껏 차려놓고 모친은 집으로 돌아가고 동방삭은 주변에 숨었다.     


그때 세 사람이 차려놓은 준비물 앞을 지나가는데  배도 고프고 돈도 떨어지고 신발은 다 해진 꼴이었다. 밥을 보고는  “웬 진수성찬이야?” 하고 먹고 가자 하였다. 세 사람이 한 그릇씩 먹고 신과 돈도 나눠 가진 다음 동방삭의 집을 찾아 나섰다.   

   

모친이 동방삭을 찾는 세 사람에게  “우리 아들이 돈 셋냥, 밥 세 그릇, 신 세 켤레를 마련해 달라 하여 동구밖으로 이미 가지고 갔습니다.” 하였다.    

 

세 사람은 “우리가 동방삭이 갔다 놓은 밥을 먹은 게 분명하니 잡아가기가 난처하다. 그냥 가자.” 하고는 온 길을 되돌아 염라대왕에게 갔다.      


이때 동방삭을 잡으러 간 저승사자를 기다리던 염라대왕은 동방삭의 수명이 기록된 책을 펴놓고 졸고 있었다. 저승사자 셋 중 영리한 사자가 붓을 들고 十자의 웃머리에 점을 찍어 千자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염라대왕을 깨웠다.     


“동방삭의 상(相)을 보니 오늘 데리고 올 사람이 아닙니다.  명부책을 자세히 보세요?” 대차 자세히 보니 三十이 아닌 三千이거든.   

   

염라대왕이 말하길  “너희가 나보다 낫구나. 그냥 잡아왔으면 큰일이 날뻔했다.” 하였다. 그래서 다섯 살밖에 못 살 운이 삼천갑자를 살게 되었다(셈법 : 1년에 6번 갑자가 있어 30 갑자는 5살이 됨).     


동방삭 설화의 분포와 내용      


동방삭 설화는 제주도 포함하여 전국 지역에서 42 편이 전래한다(서울과 인천 제외.) 설화 내용을 크게 보면 오래 살게 된 이유, 오래 산 동방삭 잡아오기, 삼천갑자나 살았음에도 죽은 동방삭 등이다.    

  

제일 많은 설화는 오래 살게 된 이유이다. 원래 단명의 운명이었는데 저승사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전통시대 무병장수와 동방삭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30~40대로 일생 최대의 복은 무병장수였다. 그래서 왕실, 양반, 부자 등은 십장생 또는 장생도를 그린 병풍이나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백성들은 생활의 형편상 보름달을 바라보거나 동네 인근의 기도처인 부군당(마을 수호신을 모신 곳) 등에서 동방삭을 모델로 하여 장수를 기원했다.


상갓집에서는 죽은 이를 데려가는 저승사자를 위해서 밥 세 그릇, 신 세 켤레, 돈 셋냥을 준비하는 풍속이 있었다.

 

동방삭은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 전 중국 한나라 무제 때의 실존 인물이다. 한무제가 널리 인재를 구할 때 스스로 자신을 천거하는 글을 써서 벼슬을 받았다.(당시 인재는 유명한 사람의 추천서 필요))     


성격은 유머스럽고 재치와 지혜가 넘쳤다 한다. 폭군인 무제 앞에서 우스개 소리를 이용 쓴소리도 자주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벼슬을 못하여 한때 우울하게 지낸 적도 있었다.  장수했다는 설화와 다르게 실제 수명은 62세였다.     


동방삭이 고관을 엮임하고 임금의 비위나 맞추는 행동을 하였다면 우리 설화층의 사랑을 못 받고 그저 한때 잘 먹고살다 간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설화와 지명     


위 설화는 영동군에서 전래되어 온 이야기이다. 삼국초기 지명은 길동(吉同)이라 하였는데  757년 경덕왕이 전국 지명을 10개월 만에 모두 개명할 때 영동(永同)이라 하였는데  이 지명을 현재도 사용하고 있으며 永이라는 한자가 오래됨의 뜻이 있으니 동방삭의 장수와 어울리는 이름이다.


다음회 설화는 입이 경박하여 사로잡힌 동방삭 편이다. 아마 조건이 따르는 봉사는 뒤탈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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