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과 한반도는 오랫동안 교류해 왔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는 기원전 11세기에 상나라가 망하자 왕족인 기자와 유민들이 주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요동 방향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록부터 고려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상해 부근의 해적을 소탕하자 많은 해적이 한반도의 고부 등으로 도망갔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를 좀 더 살펴보면 기자조선은 나중에 북경지역의 연나라에서 도망친 위만에게 쫓겨 익산에 안착하였다. 또 진나라 건국과 망국의 혼란을 피해 도망친 무리들이 신라를 건국하였다고 하며 최치원도 신라는 연나라 사람들이 건국하였다고 했다.
이와 반대로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수십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백제 전성기에 중국의 요서에 백제의 관리지역을 뒀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처럼 많은 교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우리 겨레의 중국대륙에서 활동상 위주로 엮어 나가겠다.
당나라에서 활동하는 우리 겨레를 두 분류로 나눠볼 수 있는데 우선 중국 땅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한반도 출신 그룹이다. 장보고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재당 신라인이 대표적인데 백제가 망한 후 당나라로 피산한 서남해 바닷가 출신의 이주민이 많았다.
또한 경기도 해안지방이나 황해도의 바닷가 출신의 고구려 유민들의 보트피플도 있었으며 심지어 한반도에서 팔려가는 노예들도 있었다. 이들은 신분이나 출신 지역은 달랐을 것이나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어렵고 가혹한 삶을 살다 보니 서로 간의 끈끈한 정과 상부상조로 단단한 사회를 이뤄 살았다.
다으으로 한반도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을 왕래하는 그룹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우선 신라가 공식사절로 보낸 견당사가 있다. 이들의 규모는 상당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621년부터 912년까지 204회 파견하였는데 1회 규모는 100명~250여 명이었다. 총인원을 추산하면 2만 명~5만 명 정도나 된다.
다음으로 유학생이다. 837년 당나라의 국립대학인 국학에 유학하고 있는 신라학생은 216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체 기간으로 보면 2000명이 넘었다 한다. 또 불교를 배우려 당나라를 방문한 구법승으로 8~9세기에 이름이 확인된 스님이 80여 명이다. 상인그룹도 있는데 규모는 확인되지 않으나 무척 많았을 것이다.
신라 경주 최전성기의 인구가 15만 명 정도였다 하니 교류인의 규모가 대단함을 인정할 수 있다. 조선 시대와 비교해 보면 세종시기 북경을 갔다 온 사람이 215명, 이성계 시기 73 태종 시기 125명이었다.
당나라와의 교역 경로는 서해바다의 해상통로와 중국내륙의 대운하로 나눠 볼 수 있다. 바다와 운하라는 다른 교역통로이나 배의 이용이 필수인데 한반도 서남해에서 살았던 백제 유민 등의 선천적인 배 건조기술과 운항 노하우는 중국인들에게 돋보였다.
또한 이들은 망국이나 정치적 이유 등으로 중국에서 삶을 꾸려가야 했던 피난자 혹은 도망자 처지인지라 특별한 재주나 재산이 없는 경우도 많아 이들이 종사하는 일은 힘들고 위험해서 중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분야를 헤집고 정착하였다.
예를 들면 뱃사공, 선원, 화물과 승객운송, 제염업, 숯 굽기, 선박수리 등에 종사하며 삶을 이어갔다. 고달픈 삶과 생존력이 서로 연결이 되어 운하와 해양무역거점에 상품의 전달 보관하는 물류망을 만들고 연결하는 물류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당시 일본의 엔닌 스님이 9년 동안 당나라를 여행한 여행기를 남겼는데 등장인물의 절반이상이 신라인이며 여행에 필요한 증명서를 신라인이 마련해줬다 한다.
당나라와 교류는 신분과 성격에 따라 정해진 교류통로에 따라 이동하였다. 공식 방문자인 견당사는 산동지역에 상륙 후 중국 당국의 공식 관리통로를 따라 장안이나 서안을 방문하였을 것이며 교통로 주변에 역참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현제로 치면 고속도로와 인근의 숙소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통과지역의 주현(州•縣)의 관리를 만났을 것인데 그러면서 그 지역의 지명을 자연스럽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거쳐가는 지역은 산동성, 하남성, 산서성, 섬사성 등 중국의 핵심 지역의 주현이었다
다음으로 많은 유학생의 경우 이용통로는 견당사과 비슷하였을 것이나 관도의 이용 원칙상 공무상 통행자가 우선이라 이들의 통행을 위해 일부 제한이 있을 수 있어 관도 주변의 일반도로와 개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이용하였을 수 있다. 일종의 지방도로이며 이들도 지역 주현 관리자의 통제를 받으며 여행지역의 지명을 접촉하였을 것이다.
구법승들의 행선지는 견당사나 유학생의 방문지와는 다르게 유명 사찰이나 고승이 있는 지방이었다. 이들이 방문한 지역은 섬서성, 안휘성, 하북성. 광동성, 사천성, 복건성 및 호남성 지역 등이었다. 당시 군사지역이나 국경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사찰을 찾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이동통로는 중국 백성들이 이용하는 도로와 숙소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의 공식 지명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향토 지명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역과 배를 이용하는 상인집단이다. 이들은 중국 해양연안 주변이나 중국 강남과 강북의 잇는 2500km의 운하를 통과하고 무역을 하면서 주변의 지명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