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중화주의 늪에 빠지다
백제의 대야성 싸움은 성왕의 복수전이고 신흥 정치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었다. 신라는 허를 찔려 당나라와 교류선이 끊기고 삼국 간의 힘의 평형이 깨지게 되었다. 경주가 직접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지자 김춘추는 중국으로 건너가 당태종 이세민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과적으로 김춘추의 당나라 입국은 신라에게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를 가져왔으나 당나라에게 한반도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우리는 중화주의 늪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는 중국 고대 지명학이 성숙되는 단계이었다. 즉 이 시기에 들어서 중국은 지명의 표준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지명의 명명 방식, 지명에 사용하는 글자와 어원의 정리, 지명에 사용되는 글자의 발음을 확정하였다.
또한 동급 행정단위의 중복 지명 줄이기, 유사한 음의 글자 없애기 등 지명 체계가 확립이 되었다. 지명에 대한 표준화와 체계가 정립되는 시기에 김춘추는 당나라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지명의 문화는 문화의 한 부분으로 한쪽의 변화는 다른 한족의 변화를 이끈다. 그러면 중국의 문화와 그 주변국의 문화가 만나면 어떤 양상을 초래했을까? 중국의 문화는 한족 중심의 농경문화가 기본이었다. 이런 농경의 문화가 발달하고 팽창하면서 주변 나라와 접촉이 일어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주변의 비한족 또는 비농업의 문화가 한족 위주의 농경문화가 만나게 되면 이들 문화는 중국의 문화로 융합되거나 중화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두 가지 경향을 띄었다.
융합은 비한족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 녹여져서 원래 모습도 찾기도 어려워진 현상을 말하는데 유목족이 한족을 무력으로 정복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족문화에 녹여져 버리는 예가 대표적이다.
중화주의는 중국 중심의 정치 문화 등이 우수하므로 주변 나라의 정치와 문화를 지도해야 하며 주변 나라는 중국을 떠 받들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고약한 사고방식이다.
우리 겨레의 경우 우리의 삶터는 중국의 문화중심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고 두 문화의 전이 지역에는 자연적 지형이 장막의 역할을 하여 그들의 문화가 몰려오기에 어려운 여건이었다. 또한 우리 문화의 강인한 생명력도 한몫을 하여 중국문화에 융합되지 않았다.
단지 중국 제국의 힘을 장착한 문화는 강력하고 수준이 높아 우리 겨레는 중화주의 체제를 형식적으로 인정하여 생존과 발전을 도모해 왔었다. 그러나 김춘추의 당나라 입당은 이러한 경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요녕성과 허베이 성 사이 산악지형과 요서주랑(길이 185km 폭 8~15km, 바이두)
김춘추는 신라의 차기 왕위 계승자 신분으로 당나라를 방문했다. 국학을 우선 참관한 후 당태종을 만나 백제 정복을 위한 파병을 요청하면서 당나라 장복과 연호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다. 또한 동행한 아들을 중국에 남겨 태종의 호위대에 수용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런 행위의 영향과 의미를 살펴보자. 직접적인 영향은 백제 고구려의 멸망 동기 제공이고 근원적인 영향은 한반도 지배계층과 지식인들이 중국의 문화에 크게 경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국학은 중국 국가 시스템과 정신문화의 중추기관으로 국가 지배이념과 이를 추진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국학을 우선 방문함은 이 기관의 이념을 이해하고 당나라의 지식층에게 신라인도 따라 하겠으니 이를 지지해 달라는 의사 표현이다.
그다음 당태종을 만나 신라는 바다 건너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나라이나 계속 당나라에 조회(朝會)하게 도와 달라고 말을 하면서 장복(章服)과 연호(年號)를 사용하겠다고 자청한다. 장복은 중화주의와 황제라는 중국식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무늬를 넣은 옷으로 국가의 의례나 행사에서 입는 공식 복장이다.
김춘추가 이 장복을 신라의 공식 행사와 의식에 사용하게 해 달라 함은 우리 지배층과 지식층의 정신세계가 중국에 컨트롤될 수 있게 환경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연호 사용은 삶터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중국인과 같은 시간에 살겠다는 뜻으로 우리 삶의 시간표를 중국 시간표에 맞춤을 말한다.
이처럼 정신세계와 현실의 삶을 중국식으로 하여 지냄은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과 행동방식이 중국화 되어 중화세계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지명의 개명과 관리는 특정 공간에 대한 지배층의 의향을 담고 있는 행위로 지명이 사용되는 기간만큼 그들의 의향에 따라 지배함을 의미한다고 봤을 때 김춘추의 행위는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의 지명이 중국식으로 변해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마치 현재 우리 삶터 주변 가게 이름에 쓰인 미국풍의 지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김춘추의 행위는 당태종 입장에서 무척 기쁘고 자신의 체면을 다시 살려볼 수 있는 좋은 선물을 하는 셈이었다. 당태종은 큰 비난을 무릅쓰고 황제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체면을 크게 상한 처지였다.
이런 싸움 직후에 김춘추가 찾아온 것이었다. 당태종은 매우 좋아하며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귀국할 때 대부분의 관리를 참여시키는 연회를 베풀고 환송하였다.
당태종은 백제에게 빼앗은 신라의 영토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나 백제는 반응하지 않자 파병을 추진한다. 그러나 파병의 실행은 당태종이 죽게 되어 실현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고종 때 대규모 군사를 한반도에 보내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하였다.
이처럼 깊은 영향을 가져온 김춘추의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는 개인적인 복수를 공적으로 사용한 측면이 있다. 백제와의 원한 관계를 씻는 노력 없이 외세에 의존하여 그들의 힘과 문화를 끌어들였다. 개인복수와 국가안보를 냉철히 구분하지 못함이 이날까? 또한 당나라의 파병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한 것이지 김춘추를 위해 한 행위는 아닐 것이다.
즉 늑대를 잡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형국이라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외세와 관계 맺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