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의 중심지역은 황하유역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분포하였는데 비옥한 땅과 온난한 기후로 농경에 적합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족 위주의 농경민으로 농사의 특징상 하늘과 땅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이해하고 기억해야 했다.
또한 삶의 터전이 고정적이어서 쌓인 지식을 후대에 전달이 용이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였다. 단지 황하의 범람으로 수해가 잦아 피해가 많았으나 오히려 이런 재해를 극복해하기 위한 거대한 국가가 출현하고 효과적인 행정체제가 만들어져서 더 많은 지식과 문화가 집적되었다.
과거 중국의 중심인 중화, 바이두 지도
그러나 우리 겨레의 삶터인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산악지형이 많고 강이 여러 곳에 나뉘어 흘러 사람들이 모여 살며 농사짓는 지역이 분산되었고 생산력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거대한 황하유역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처럼 큰 규모의 통일된 국가나 관리체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다 보니 강의 분포지역에 따라 국가가 분산되었으며 지식과 문화의 집접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대부분의 강이 서해바다를 향해 흘러 지역별로 강의 흐름을 이용하여 중국과 교류와 교역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겨레는 중화지역에 뒤처지지 않는 넓은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된 국가체체가 아닌 여러 국가의 병존으로 중국제국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며 살아왔다.
국가 간 또는 지역 간의 교류를 하자면 교류지역의 교통로와 지명을 알아야 함은 당연하다. 이들을 파악하는 경로는 외교사절을 통해 또는 무역하는 상인들의 왕래로 여러 지역의 지명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의 전파와 군사활동을 통해서도 필요한 지명을 습득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입국하여 목적지를 가려면 과소(過所 검문소)를 통과하여 정해진 교통로를 따라 이동을 하며 교통로 중간에 설치되어 있는 역참(숙소 겸 물품 구입 장소)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였다.
또한 역참이 설치된 지역의 주(州) 행정관원의 관리를 받아야 했다.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안전과 물자 수급 그리고 잠자리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옛날의 경우 걷거나 마차를 이용해야 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왕조시대 교통로와 역참을 국가가 설치하고 관리하였던 것이다.
그럼 중국과 한반도의 여행통로의 중심은 육로일까 바닷길일까? 우선 육로에 대해 알아보자. 북경지역과 요령성의 연결 부분이 특이하다. 이 부분의 지형은 대부분은 높은 산악지대로 되어있고 발해 바다와의 연안지역은 낮고 폭이 좁은 긴 지형(요서회랑)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의 교통로는 이 회랑지대를 이용하였으나 이 지역은 늪지대가 곳곳에 산재되어 많은 사람과 물자가 이동할 수 있는 교통로를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나라 역사서에는 유주(현 북경일대) 밖은 주(州)와 현(縣)이 없어 군대 행차도 어렵고 양식을 조달받기도 곤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곳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고구려의 산성이 평양까지 176개나 설치되어 있어 사살상의 군사 작전권지역이라 일반 백성은 다니기에 더욱 곤란하였다.
그럼 어느 길로 다녔을까? 당연히 바닷길이다. 중국과 우리 겨레의 바닷길의 이용 기록을 알아보자. 고조선은 발해만에서 산동반도를 잇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으며 한반도의 나라들이 한나라와 직접 무역을 방해하여 한무제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낙랑과 한나라의 교통을 조직적으로 방해하였다. 낙랑군도 대동강에서 요동반도와 산동을 거치는 교통로를 가지고 있었는데 남쪽의 해상무역 강자인 백제를 계획적으로 방해하여 백제와 중국의 무역로를 차단하였다.
백제는 서남해에서 요동반도 발해만 산동반도를 잇는 교통로를 가지고 있었으나 고구려나 낙랑의 방해가 많아지자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의 직항로를 개척하였다.
그간 우리의 인식은 조선의 해금정책의 영향(태종시기부터 고종 때까지)으로 바다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매우 미약한 해양활동을 했으며 바다를 교류와 통행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이는 조선왕조시기만 시각이다.
오히려 삼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서해바다를 지금의 고속도로처럼 빨리 움직일 수 있고 물품을 대량으로 이동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때 서해 바다는 동아시아의 물류와 정보 교류의 허브 내지 인터체인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었다.
역참은 중국 측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교통수단인 말의 교체, 식료품, 휴식장소로 제공하기 위해 보통 30리마다 1개소씩 설치하여 관원을 배치하였다. 이곳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은 허가증을 소지하여야 했다.
이 증서는 중앙정부의 상서성이나 지방관아인 주의 관청에서 발행하였다. 허가증은 정본과 부본을 준비하여 정본은 발행부서에 부본은 역참에 보관하여 이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확인하였다. 역참의 통과자는 설명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는데 기재내용은 사유, 인원, 신분, 나이, 노비, 가축까지 기재하여야 했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 당나라 영토 내의 임의 이동은 불가하였으며 규정에 따른 수속이 필수였는데 당나라의 이부(현 행안부+외교부)에서 발행한 증명서를 소지하여야 과소(过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각주(州)의 행정관원의 검사가 필수였다, 이를 통해 출행목적과 행동을 통제하였다.
역참의 이름은 어떠게 작명을 했을까? 자연경관 문화요소 상징의미를 담아 명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 지역과 부합되는 작명으로 통과자들은 당연히 기억해야 할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