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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Sep 04. 2024

우리말 지명, 한자로 겉을
둘러 씌우다

1. 우리말 지명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순수 우리말로 지어진 지명의 모습을 삼한시대의 국가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 이름이 한자로 둘러 씌워져 있어 우리말의 모습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곤란하나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이들 나라의 개략적인 위치는 황해도 이남이며 개별 국가가 있었던 지역의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국가의 이름은  감해비리국, 구사오단국, 미리미동국, 신분활국 등으로  78개소가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행정지명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 국가는 영토 사람 주권이 있는 근대의 개념이 아니고 중요지역을 넘나드는 길목에 보초병이 있는 정도의 지역 공동체 내지 부족 집단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 이름은 우리의 기록이 아닌 중국의 삼국에 관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자는 진수라는 사람으로 한반도와는 수천 km 떨어진 진나라의 낙양에서 이 일을 하였다. 그는 낙양 서남쪽 사천지방에서 태어나 그 지역 국가인 촉나라에서 관리를 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적국인 진나라에 몸을 의탁했다.    

  

이들 이름의 글자 숫자는 3~5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국시대를 거치면서에 아(阿),예(也),나(那),부리(夫里),구(仇) 등 기초 수준의 한자의 삽입 또는 대체되는 모습의 지명으로 바뀐 후  삼국 통일을 거처 신라 중기에 당나라식으로 일제히 개명이 된다. 


2. 삼한시대 국가들의 이합집산과 지명


78개의 나라는 백제, 신라, 가야 등으로 재편이 되고 삼국시대로 접어든다. 이는 좀 더 강한 국가가 주변의 나라를 포섭, 정복, 통합 과정의 결과이다.  이 과정의 진행방식과 내용에 따라 원래 국가이름이 보존되기도 하고 일부 또는 전부 변경되기도 한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는 54개 국가가 있었다. 이들은 권역별로 맹주가 있으나 각 나라들은 매우 느슨한 관계로 연결되어 독자성을 유자하고 있었다. 또한 맹주 위치의 국가는 중국의 지방행정 조직인 군현과 무역과 외교교섭을 대행하기도 했다.

  

54개 국가의 대부분 장악한 나라는 백제이었다. 정복 군주인 근초고왕이 영산강 유역 세력을 흡수할 때 군사력에 의한 강제력으로 그 지역을 통합하기보다는 자립권을 인정한 연합형태를 취했으며 나중에 성왕 때에 비로소 백제에 완전히 포함됐다. 


백제 멸망 130여 년 전 일이다. 신라의 경우 가야세력을 흡수할 때 금관가야처럼 평화적으로 포섭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흡수하기도 한다. 이 또한 530년대 진흥왕 시기로 백제와 신라의 인접 소국의 흡수 시기는 비슷하다. 


이처럼 백제와 신라의 다른 팽창방식은 지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연합형태의 경우 지명은 예전 이름을 사용하거나 약간의 변화만 있게 되나 무력으로 흡수하는 경우는 변화가 많이 수반되는 경향을 띤다.   


예를 들면 경북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이었는데 신라초기에 경주중심의 서라벌 연합체에 포함되면서 사벌주로 바뀐다. 그 후 국가체제가 갖춰진 법흥왕 때 상주(上州)로 경덕왕 때 상주(尙州)로 개명된다.


 경남 하동군도 삼한시대에는 낙로국(樂奴國)이었는데 가야시대에 다사성(多沙城), 백제의 간접지배에 포함되어 한다사군(韓多沙郡)라 하였으며 통일 신라에서 현재의 하동으로 개명됐다.   

 

이처럼 78개 국가가 신라로 통일되기까지 많은 사건이 있어 그 속에는 다양한 인간관계 내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국가의 팽창은 정치권력의 땅따먹기 행위로 그 과정에 음모와 배신, 원한과 복수가 수반되었을 것이며 이들은 인간관계의 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수백 개의 나라가 하나의 국가로 편입된 것이 진시황의 진나라이다. 이 과정에서 나라들끼리 인간들끼리 흥망과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과 그 속에 생존해야만 하는 삶의 처절한 고뇌의 결과가 나왔다. 


이 발명품은 법가, 유가, 묵가 등으로 이때 피어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간관계를 망라하는 인문의 집합체이다. 우리의 경우도 신라로 귀결되면서 중국의 제자백가들처럼 무수히 많은 인간관계와 이야기가 표출되어 어떤 문화를 이뤘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으니 중국의 사정을 견줘 짐작할 뿐이다.      


3. 중국의 구심력의 동진에 우리는 중심축을 남쪽으로 옮기고


왕조시대 중국의 변화는 우리 계례의 생존과 개개인의 삶에서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작용해 국가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삶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의 군대가 직접 와서 우리를 망하게 하기도 하고 사람이나 문물이 들어와서 우리 삶의 변화를 요구하거나 우리 옆에  터전을 잡기도 하였다.     


더욱이 중국대륙은 한나라가 망한 후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400여 년간의 대단한 혼란기를 거치는데  유목과 농경 세력이 하나로 융합된 거대한 제국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제국의 대표가 수나라와 당나라이며 이들은 중심축을 황하 유역을 따라 서쪽에서 한반도 방향으로 동진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 제국의 중심축이 한반도 방향으로 이동


그리하여 거대해진 구심력을 우리 겨레의 터전에 노골적으로 강하게 미쳐 우리를 강제로 흡수하려 하였다. 이른바 수나라 당나라와 우리 겨레의 80여 년의 전쟁이다.


 이 구심력에 흡수되지 않고 대항하기 위해 우리 겨레의 대표인 고구려는 중심축을 북쪽의 요동에서 남쪽한반도 이동한다. 이는 산악이 매우 촘촘하여 방어에 유리하며 강과 넓은 농경지를 보유한 지역 특성을 잘 활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즉 고구려는 중심축을 평양으로 이전한 후 후방의 안전 확보를 위해 한강방향으로 힘을 쏟자 백제가 경기도에서 충정지역으로 밀려가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한강유역은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며 넓은 농경지와 강을 활용한 교통의 편리함으로 한반도에서 국가 흥망의 절대적 역할을 한 바 백제는 신라 및 가야와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 되찾기를 도모한다. 


그런 와중에 배신과 원한 그리고 복수가 잇따라 결국 신라는 중국으로 기울어지는 상황이 야기되고 이로 인해 우리 겨레에는 고구려의 고토를 잃는 천년의 한을 초래한다, 그 이야기의 전개는 다음회에.

중심축을 대동강유역으로 옮기다-지도출처(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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